마주하는 시간

차가 마련해주는 것들에 대하여

by 방랑티객

Credit: Photo by COARSE + FINE, Unsplash


아직도 아침이면 잠을 깨기 위해 습관처럼 캡슐 커피를 내린다.

모든게 귀찮은 아침엔 무조건 캡슐이다. “쓰다, 써, 써...” 중얼거리면서도 매일 반복하는 걸 보면, 버릇이라는 건 참 무섭다. 찻잎을 우리는 일은 아직 나에겐 여간 번거로운 일이지만, 며칠 전 맛봤던 고소한 감잎차가 잊히지 않아 결국 찻장을 뒤적이게 된다.


3년째 남편이랑 때 아닌 장거리 연애(?) 중이라 서울 부모님 댁에 머무는 중인데, 부모님이 차를 우려 드시는 모습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찻주전자 같은 건 없겠거니 했…

어라? 의외로 찻주전자 하나가 찻장 깊숙이 숨어 있었다. 게다가 각양각색의 귀여운 찻잔까지.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다!


아마 이 다기들은 손님 접대용으로 오래전부터 구비해 두신 걸 테다. 외할머니가 생전에 계실 때는 어르신들이 종종 우리 집을 찾곤 했으니까. 문득, 외할머니도 그립지만, 그 곁을 지키며 고단함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던 엄마의 모습이 더 그립다. 우연히 마주친 다기 한 벌이 반갑기 그지없다. 동시에 그 안에 고요히 서린 시간의 그림자들이 스쳐가며 코끝이 시큰해진다. 지금은 곁에 없는 이들의 기억이, 다기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먼지처럼 희미하다. 찻장 깊숙이 잊혀졌던 찻주전자는, 한때 빛났던 엄마의 청춘을 닮은 듯해 괜히 마음이 먹먹하다.


보물처럼 소중한 기억들이다.


결국, 찻 주전자 따로, 찻잔 따로. 망은 없고, 사발 대신 밥그릇을 쓴다.

우리집은 정수기를 써서 전기포트가 없는게 문제다.


'방에서 유튜브 보면서 느긋하게 마시고 싶은데…'


할 수 없이 정수기 앞에서 차를 우리고, 첫 번째 찻물을 커다란 유리컵에 전부 따라마신다.

찻잔에 한 모금씩 따라마시는 감질맛도, 번거롭지만 은근한 재미도 온데간데 없지만, 그래도 향은 좋고 맛도 여전하다. 생맥주처럼 한 잔 가득 따라 마시는 것도 의외로 괜찮다. 컵에 코를 푹 박고, 폴폴 올라오는 증기를 깊이 들이마시기도 좋다.


단지, 차를 우릴 때마다 내가 자꾸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곁에 자리 잡은 강아지의 엉덩이까지 덩달아 들썩인다. 백살 넘은 노견인데, 괜히 미안해진다. 차 향이 좋아서일까, 오늘따라 곁에 와 있는 게 괜히 더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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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내돈내茶 | 지리산 어린 감잎차


고소하고 맑은 맛이 은근히 감돌아, 조용한 오후에 딱 어울린다.

예부터 감기약처럼 마셨다던 이 차엔 비타민 C도 가득. 피로가 잦은 날, 몸도 마음도 가볍게 덖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