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좋은 소식이 없다
애는 언제 낳을 거냐는 질문을 앞으로 수도 없이 듣게 될 것 같다. 적어도 향후 몇 년 간은 낳을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남편으로서, 친구로서, 인간으로서 평생을 함께 살아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랑 일찌감치 성공적인 결혼을 하는 바람에 결혼 언제 할 거냐는 질문은 들어볼 새가 없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 와중에 불행인 건 내가 받을 그런 류의 질문이 여전히 하나는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부터는 ‘좋은 소식 없느냐’는 소리를 들을 일이 없어서 좋다. 둘 사이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로 정리된 지 1년 여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혹은 일 문제로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그 질문을 아주 당연하게 해댔다. 그게 마치 무슨 최고의 안부 인사라도 되는 것처럼.
(띠리리리리)
네, 고건녕입니다.
오이~ 건녕 씨~ 잘 지냈나~
어! 안녕하세요 원장님, 많이 바쁘시죠? (바쁘긴 개뿔, 맨날 놀고 있을 거다)
여기도 똑같아~ 건녕 씨는 좋은 소식 없나?
네? 무슨 좋은 소식이요? 아.... 네, 아직 계획이 없어서요.
에이, 그러면 안돼~ 이제 나이도 있는데~ 허허허~
전 상사의 전화였다. 그는 내가 일하던 제주 사무실의 부서장으로 2년 간 있었는데, 다른 지역으로 발령받아 떠난 지 이미 두세 달이 흐른 후였다. 몇 달만에 하는 대화치고는 지나치게 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우 무례한 질문이라고도 여겨졌다.
일로 부딪힐 때는 징그럽고 꼴 보기 싫은 인간이라도 막상 일로 얽히지 않게 되면 신기하게 나쁜 기억은 점차 희미해지고 중립적인 감정만 남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어딨어, 라는 생각이 들며 상대를 싫어하는 마음이 점차 누그러지는 것이다. 그 역시 나에게 점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좋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 사람으로. 하지만 우습게도 전화 한 통으로 순식간에 그가 다시 싫어지고 말았다.
i) 좋은 소식
좋은 소식 없냐고 물었을 때 나는 사실 단번에 알아듣지도 못했다. 내 입장에서는 몹시 뜬금없는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이라니, 무슨 말이지? 나한테 좋은 소식 있을 만한 게 있나? 승진, 성과 상여금 아니면 포상 같이 직장과 관련된 것만 떠올랐다. 전 직장 상사가 ‘좋은 소식’을 운운하며 물어볼 만한 가능성이 있는 일이 나에게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머릿속에 느낌표가 켜 졌다.
아, 이 사람 ‘임신’을 이야기하는 거구나.
그가 이런 사람이라는 건 함께 일하던 시절의 수많은 일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맷집이 부족한 것인지 나는 또 혼자 속으로 발끈하고 있었다. 친절을 가장하여 지극히 사적인 영역의 문제를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들출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ii) 나이도 있는데
어쩌면 ‘좋은 소식’보다도 이 대목에서 기분이 더 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이 절대 ‘나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ㅇㅇ을 하기에 나이가 있다’는 말을 되도록 멀리하려고 노력한다. 아무 근거 없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대학에 가야 할 나이. 취업해야 할 나이. 결혼해야 할 나이. 애 낳아야 할 나이.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정말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무방비 상태인 채로 그에게 이런 소리를 들은 사람이 나 말고도 많을 터였다. 그는 몇십 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해 오면서 결혼 적령기(사실 이 말도 웃기다)의 여성이나 결혼은 했으나 아이가 없는 여성들에게 쭈욱 똑같은 레퍼토리를 선보여 왔을 것이었다. ‘이제 결혼할 때 되지 않았나. 나이도 있는데, 허허허.’, ‘나이 더 먹으면 힘들어. 이제 하나 낳아야지, 허허허.’ 같은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왔겠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그에게 보이지 않는 상처를 입고도 아닌 척하며 가짜 웃음을 지었을지 모르겠다. 정작 그 자신은 죽을 때까지 그게 실수고 잘못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나보다 세 살 어린 여동생이 스위스에 살며 아이 셋을 임신하고 출산하고 육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그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값지고 존경받아 마땅할 일인지는 어렴풋이 안다. 셋이나 되는 조카들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며 세상에 발 붙이는 모습은 때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나와 연이는 그 신비로우면서도 엄청난 세계에 발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아직은 없을 뿐, 우리 아이가 둘 중 누구를 더 닮길 바라는지, 아이를 낳는다면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지, 어떤 환경에서 자라게 해 주고 싶은지에 대해 꽤 많은 대화를 나눈다.
피부는 연이 너를 닮았으면 좋겠어. 아, 팔다리 긴 것도. 아니다, 사실 어떻게 태어나도 상관없고 자기의 매력을 아는 사람이면 좋겠어. 사랑을 넘치도록 받아서 아낌없이 줄 수도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그림은 잘 그리는데 수학을 못 한다고 해서 수학 학원에 다니게 하지는 않을 거야. 그 시간에 손 잡고 미술관을 들락거려야지. 공부를 하고 싶어 하면 최대한 지원해 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굳이 공부에 시간을 낭비하게 하지 말자.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도록 많이 보고 듣고 느끼게 해 주고 싶어.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하기만 하면 좋겠어.
우리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 빛나는 사람으로 자라날지 궁금해서라도 언젠가는 아이를 낳게 될 것 같다. 다만 지금이 아닐 뿐이다. ‘좋은 소식’이 생긴다면, 그리고 당신이 그 좋은 소식을 알고 있어야 할 만큼 소중한 사람이라면 언젠가 좋은 소식은 들릴 것이다. 우리와 다르게 누군가는 평생 ‘좋은 소식’을 만들지 않기로 마음먹었을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존중받아야 할 결정이며, 나와 연이의 결심도 언제 바뀌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너무 궁금하더라도 좋은 소식에 대한 질문은 넣어두자. 우리에게는 좋은 소식이 없다. 그리고 당분간은 계속 없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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