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다닐 때 내 말과 삶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주 부끄러웠다.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당당해지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다. 미술을 시작한 후로 확실히 그 전보다 당당해지긴 했다. 내가 떠들고 다니는 소리가 내 삶과 덜 부딪쳤다. 그런데 예술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아주 조금의 간극만 생겨도 전보다 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힘을 줄수록, 뭘 하려고 할수록 나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힘을 빼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삶에 어떻게 적용하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
예전에는 무언가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좋았다. 나도 그런 눈을 갖고 있었고 그런 자신이 좋았다. 그게 젊고 아름답고 순수한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그런 순수한 열정을 높이 사기는 하지만 전만큼은 아니다. 그런 열정이 간절함이 되고 간절함은 내면에 정답(성취)과 오답(실패)을 만들어내곤 했다. 철학과에서 머리로 얻은 첫 번째 깨달음이 모든 이분법에서 벗어나자는 거였는데 여전히 완전한 체화에는 못 이르렀다. 내게는 여전히 열정, 야망, 욕심 같은 것들이 도사리고 있었고 도달해야 할 무언가가 내재돼있었다. 놀라운 건 미술을 시작하고 나서도 같은 맥락을 반복하고 있었으면서 그걸 깨닫지 못한 채 단지 창작의 고통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학교에서 공부하고, 어느 정도 퀄리티의 작업을, 언제까지 끝내야 한다는 둥의 열정을 빙자한 온갖 틀로 스스로를 재단하고 가뒀다. 학교 밖의 나를, 미완의 작업들을 부정하는 게 나 자신인 줄 모르고 세상이 나를 괴롭힌다 불평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번뜩 깨달았다. 여전히 같은 구도를 못 벗어났다는 걸. 내가 하고 있는 건 예술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아니었다. 그건 멋진 무언가였고 나는 그렇지 않았다.
열정을 갖기는 갖되 그게 자신을 해방하는 쪽이어야지 내 경우처럼 좇아야 할 이상을 자꾸 만들어서 자신을 소외시키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자신이 괴로워지기 때문이다. 내가 회사를 관둔 게 당시로서는 이상과 현실 사이를 좁히려는 시도이긴 했지만 애초에 문제는 그 구도 자체에 있었다. 그 관점으로는 회사를 관두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이상과 현실이라는 구도 자체를 삶에서 지워야 한다. 도달해야 할 이상이란 건 없고 우리가 가진 건 오직 현실뿐이다. 이걸 머리로 이해한 건 한참 전이라 이런 문장을 이미 몇 번은 썼던 거 같은데, 삶은 여전히 과거의 찌꺼기 속에 머물러 있었다는 게 참 웃기고 한심했다.
아무튼 요는 힘 빼기다. 항상 수영하는 게 사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예술도 마찬가지다. 멋지려고 하지 말고 대단한 걸 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힘을 빼고 난 빈자리가 여유다. 그게 생기면 가장 득을 보는 건 나 자신이다. 마음이 덜 동요한다. 작업이 더 재밌어진다. 타고나길 무던하고 욕심 없이 담백한 사람들은 이게 다 뭔 소린가 싶겠지만, 나 같은 욕심쟁이, 분노대장, 쌈닭은 힘 빼기가 인생 최대의 난제다. 그래도 해가 갈수록 체력 때문인지 힘이 자연스레 빠지는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