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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zembro Apr 25. 2023

주장하는 예술, 드러내는 예술

최범 디자인 평론가는 '세상에 타협한 예술과 타협하지 않은 예술, 두 가지로 나뉜다'라고 했다. 나는 주장하는 예술과 드러내는 예술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두 구분에서 모두 후자를 선호하는데, 그 둘은 때에 따라 일치하기도, 어긋나기도 하는 것 같다.


내가 모든 -이즘(-ism)을 멀리하게 된 것도 이 구분과 맥을 같이 하는데, 무슨무슨 주의자이고서는 무언가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다른 쪽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배타성을 필연적으로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예술의 개방적 본성과 어긋난다.


한 때, 나는 아주 많은 것을 주장했었다. 각종 사회, 정치, 역사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배웠고 따랐고 주장했다. 대학에 있을 때 어떤 철학과 교수가 어릴수록 보수적이라고 한 것을 한참 뒤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릴수록 경험이 적으니 한쪽의 가치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주장하는 경향이 짙다는 소리였을 것이다. 살면 살수록, 더 많은 사례의 데이터가 쌓일수록 옳고 그름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삶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권선징악 사필귀정식의 시나리오를 따르지 않으며 정답도 오답도 없는 무한한 회색지대에 가깝다.


그렇다고 염세주의에 빠져 세상의 모든 문제를 방관하거나, 모든 것을 내면의 문제로 돌려 수양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술이라는 업이, 예술이 해야 하는 역할이 과연 '주장'에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철학의 연장선상에서 예술을 공부하는 나로서는 철학이든 예술이든, 학문이란 일상에 착 달라붙어 먹고사니즘의 소용돌이 속에 머물러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공부하려면 일종의 '세속과의 거리두기'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거리를 두면 객관성을 얻게 되고, 그러면 문제가 보일 수밖에 없다. 전에 나는 문제를 본 이상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만 한다는 모종의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갖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보는 것에 집중하려 한다. 열심히 세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예술가의 시선이라는 필터를 통해 드러내는 것, 그것이 예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필터가 어떻든 그것은 예술가의 자유지만 작품을 당위성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세상에는 정치인도 있고 활동가도 있다. 예술가에게는 예술가만의 역할이 있다.


현대미술가 카메룬 제이미는 '어떤 예술가들은 존재하길 원하는 세계를 창작한다.'라고 했는데, 그 주어가 예술가만은 아니라고 본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가로 하여금 존재하길 원하는 세계를 창작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떤 예술가들은 그 기대에 부응한다. 이것이 소위 세상이 말하는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면에서는 '세상에 타협한 예술'이 아닐까. 세상은 무균실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나는 이제 옳은 것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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