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굳는 땅, 시련 뒤 단단해지는 마음
출판사로부터 계약서를 전달받고서 지면 위에다 처음 도장을 찍던 날을 기억한다. 계약서의 맨 첫 줄부터 마지막 장까지 빽빽한 간격으로 적힌 조항들을 꼼꼼하게 검토하는데, 그 당연하고 단순한 과정이 어찌나 떨리고 어렵게 느껴지던지.
그때의 나는 20대 초반이라 계약서라는 것 자체를 작성해 본 일이 전무했기에 더욱이 그 과정을 낯설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여느 출판 계약서에나 흔히 포함되는 조항인데도 괜한 노파심에 다시 읽길 수차례였고, 도장을 찍기 전엔 이미 읽은 내용을 몇 번씩 재검토하며 이대로 계약을 해도 괜찮을지 재차 고민하기도 했었다.
고심 끝에 마침내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며 나는 왠지 모르게 내가 한층 더 성숙한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느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계약'이란 건 나보다 훨씬 더 사회 경험이 풍부한 어른들만 하는 것이라고 편협하게 믿던 시절이었다.
그때, 한낱 풋내기 신인 작가에 불과했던 난 안타깝게도 출판 계약에 관해선 완전히 무지했었다. 이 중 어떤 조항이 작가에게 유리한지, 차후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지, 그 단순한 사실을 판별할 최소한의 경험치조차 없던 상태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첫 계약은 나에게 좀 더 생산적인 조건으로 조율할 수 있는 기회를 건너뛴 채 다소 아쉬운 조건으로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게 참 지금까지도 내겐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훗날 시간이 흘러 나는 이때의 내가 많이 미숙했다는 점을 성찰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부턴 계약서를 받으면 출판사와 합의가 가능한 선에서 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고 있고, 서로의 입장을 조화롭게 지켜가며 계약 조건을 원만히 조율하는 방법도 자연스레 익히게 되었다.
미숙한 나를 적나라하게 마주해야 했던 경험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다. 나는 기나긴 집필 과정 속에서 끝까지 한 배를 타고 달려야 하는 담당 편집자와 업무 상 메일을 주고받는 것도 처음엔 엄청나게 서툴렀었다.
편집자님으로부터 업무 메일이 한 통만 와도 열어보기 전부터 이유 없이 긴장했고, 어쩔 땐 메일 한 통에 답하는데 무려 한 시간이나 넘게 적당한 말을 고르다 온 진을 다 빼고서야 겨우 답장을 작성한 적도 있다. 심지어 이런 적이 꽤나 여러 번이다.
하지만 이렇게 살 떨리던 과정도 수십 번, 수 백 번 가까이 반복하다 보니 결국 익숙해졌다. 지금은 언제, 어떤 내용으로 메일이 와도 전혀 떨지 않고 침착하게 내 의견을 적어 보내며 프로답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처음 작가 일을 시작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나로 몰라보게 성장했고, 지금도 역시 어제보다 한 뼘 더 나은 나로 하루하루, 느릿하지만 확실한 성장을 이뤄가고 있는 중이다.
만약 작가 일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의 미숙함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탈피하고자 노력한 끝에 이토록 내면이 단단하고 성숙해진 나를 마주할 수 있었을까.
그 어떤 다른 길을 선택했다고 한들, 확신할 수 없음을 알기에 설령 작가로 살며 상처가 된 기억이 있더라도 이제는 부딪히며 지나온 모든 시간들에 그저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숨 가쁘게 꿈을 쫓아가는 여정에서 나는 비로소, 한 번도 용기 내 마주한 적 없는 미숙한 과거의 나로부터 건강하게 벗어나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