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일본도 엄마와 아이는 매우 밀착적인 관계를 유지합니다. 보통은 생후 7-8개월이 지나면 엄마에게 분리되어 스스로의 정체성이 생기는데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엄마와 분리되지 못하고 엄마를 의지하려는 마음상태를 아마에〈甘え〉라고 명명하였습니다.
1971년 일본의 정신분석학자이며 의사인 도이 타케오(土居健郎)는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분석한 『아마에의 구조(「甘え」の構造, あまえのこうぞう)』를 출간합니다.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은 심리학, 정신분석학, 비교문화론 등을 전공한 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최근까지도 재판을 거듭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 고전 중 하나입니다. 그만큼 도이의 주장에 공감하는 일본인이 많다는 방증이겠죠.
이 책에 대한 아마에에 대한 비판의 요지는 이게 굳이 일본인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가하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씩 가지고 있는 보편적 마음일 겁니다. 그런데 도이는 일본인의 아마네는 어떤 한 개인의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일어난다고 봤습니다.
초판
책 제목에 등장하는 ‘아마에(甘え,あまえ)’는 한자 달 감(甘)에서 알 수 있듯이 응석 부리다, 오냐오냐하다, 제멋대로 하다, 안이하다, 수줍음을 타다 등 의미를 지닌 동사, 아마에루(甘える)의 명사형입니다. 그렇다면 「‘아마에(甘え)’의 구조」란 무엇일까요?
가장 일반적인 현상은 아이가 부모에게 ‘아마에’하는 경우입니다. 아이가 사랑받고 있다거나, 자신이 상대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은 부모와 일체감이 경험하게 합니다. 이것은 만족스러운 ‘아마에’로 상대방이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일체감의 감정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른이 된 후에는 일방적인 ‘아마에’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친구, 연인관계에서 일어나는 어느 정도의 상호 의존적 아마에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힘이 약한 쪽이 힘센 사람에게 의지하는 관계는 ‘어리광’입니다. 요즘 학생들하고 말을 하다보면 말끝을 흐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날은 지각한 학생이 와서는 “그런데요 제가 오늘 몸이 아파서요”라고 말하고 죄송한듯 빤히 처다봅니다. 그래서 뭐? 아니 말을 똑바로 해야지. 몸이 아파서 병원에 다녀오느냐 늦었습니다. 아님. 아침에 못 일어나서 지각했습니다. 등 이유를 분명히 말하지 않고 미안한 말투에 끝을 흐리는 태도. 이런 것도 ‘아마에’입니다. 제가 몹시 아팠거든요. 나머지는 알아서 당신이 생각하세요.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참 몰인정한 사람입니다라는 눈빛으로...그럼 참 갑갑해지는 겁니다.
자기의 마음, 기분을 받아들이는 상대에게 이해를 기대되고 있는 거죠. 그것이 타인에게 의지하는 ‘아마에’입니다. 상대방이 나의 응석을 받아들여준다면 좋겠지만,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좌절감이 듭니다. 응석을 부리는 아마에의 감정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상처받고 타인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리고 삐지거나. 비난하고 원망합니다. 타인에게 어떤 행위, 말, 태도를 기대하고 그것에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나의 감정이 상한다면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겁니다.
의존은 심리적 용어입니다. 사회학적 용어로 말하자만 권위입니다. 응석을 부리는 쪽이 약자가 되고 응석을 받아들이는 쪽이 권위를 갖습니다. 「응석의 심리」는 권위를 전제로 하는 세계입니다. 일본 사회에서 상하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위로부터의 지시를 거부하는 건 조직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일본은 공무원의 지위가 높고 매우 단단합니다. 특히 고위공무원의 지위는 절대적입니다. .그들은 상명하복에 익숙하고 권위에 약합니다. 뿐만아니라 제조업 요식업 예술계도 도제문화가 여전히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권위, 혹은 인간관계에 의지하는 심리상태에서 타인에게 의지하는 ‘아마에(甘え)’의 경향이 발생한다고 봤습니다. ‘아마에’ 문화를 단순화시키면 ‘우리가 남이가’ 하는 문화입니다. 의리가 있는데, 내가 베푼 것이 있는데, 그동안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날 도와줄 거다’ ‘내 버려주지 않을 거다’ ‘배신하지 않을 거다’ 등의 의식을 강하게 갖는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일본의 특수한 역사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앙집권적 정부를 한번도 갖어본 적이 없는 일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다이묘(영주)와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다이묘는 다른 지역의 다이묘, 혹은 막부로 부터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며, 또한 내가 지켜줘야 하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계약관계가 아닙니다. 다이묘가 망하면 나도 망하는 거니까요.
일본 사회는 주위를 살피고(察する) 주변과 원만히 잘 지내는 것을 중시하는 문화입니다. 이런 문화에서는 타인과 다른 자신들의 생각을 당당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밣히고 의견을 조율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진행합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주장하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결과적으로 자기주장을 검열하는 문화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라는 자아는 확립되지 못하고 미분화된 상황을 지속하게 됩니다. 이런 문화는 결국 타인에게 의지하는 ‘아마에(甘え)’ 의식을 발생시키는데, 도이는 일본 사회가 가족관계를 중심으로 사회나 조직이 구축됐기 때문이라고 봤습니다.
세계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의 응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부모와 자식 관계는 인정의 세계, 응석이 허용되는 관계는 의리의 세계, 인정도 의리도 미치지 않는 관계는 타인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아무 연고가 없는 세계, 타인의 세계를 ‘의리’라는 카테고리로 묶어 가족적 인간관계를 만들려 한다는 겁니다.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으로 일종의 심리적 부채를 갖게 하고, 상대방은 은혜를 갚는 것으로 서로 돕는 상부상조의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은혜를 입었는데 상대방이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정의를 내세워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비난한다면 그건 의리를 배신하는 배은망덕한 행위가 됩니다.
아마 일본이 가족경영, 평생고용이라는 독특한 회사 운영방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사고방식에 따른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회사의 사원은 단순히 돈을 받고 일하는 근로자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의식으로 묶인 조직입니다. 그러니 회사가 어려울 때는 발 벗고 나서야 하고, 내부고발 같은 등에 칼을 꽂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행위인 거죠. 회사 거래처도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라 의리로 묶인 사이로 어지간한 일로는 흔들림 없이 밀어주고 당겨주는 관계로 묶이게 됩니다.
이런 영역 인식은 ‘아마에’ 즉 자신의 에고나 응석을 허락해주는 세계와 허락하지 않는 세계, 통상 안과 밖으로 나누어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우리가 남이가’ 의식은 일본의 야쿠자 조직에서 강하게 드러납니다.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일들을 처리하는 그들로서는 최소한 우리 편은 믿어야 제 목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이런 패거리 문화를 가장 많이 보여주는 곳이 정치권입니다. 일본은 어떤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한 파벌정치로 유명합니다. 정치도 세습하는 일본의 정치권에서 파벌은 스스로와 우리를 지켜내는 목숨을 건 싸움입니다. 우리의 정치권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음 선거에서의 당선이 목숨만큼 중하니 정치적 신념과 소신은 의리라는 이름 앞에 힘없이 무너져내립니다. 당파 싸움으로 나라가 망하든 민생이 죽든 관심조차 없었던 조선의 일부 사대부들의 모습이 오늘의 정치인들과 오버랩되면서 ‘우리가 남이가’를 국민과 해주길 간절히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