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마지막 연휴도 끝난 이 시점, 아무 데도 가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어딘가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저만 그런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여행지는 단연 일본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1945년 미국에 의한 공습 이외에는 단 한 차례도 외세의 침략을 당한 적이 없어 유물, 유적이 거의 보존되어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 가볍게 천년이 넘은 사찰, 사원, 전통가옥, 거리를 볼 수 있습니다. 항공전이 불가능했던 시기, 완전히 제압할 자신이 있지 않고서는 바다 건너 섬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어리석은 도박일 테니 말이죠. 영국도 마찬가지만 그게 섬나라의 장점이라면 장점일 겁니다.
거기에 일본은 1192년 이후 왕이 지배하는 중앙집권제가 아닌 서로 다른 나라들을 막부가 통제하는 막부체제를 명치유신 이전까지 유지했습니다. 특히 전국시대부터는 영주와 비슷한 다이묘(大名)가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에 성을 세우고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가나자와(金沢)나 아오모리(青森)의 히로사키죠(弘前城) 등은 일본의 유명한 죠카마치로 그 지역만의 독특한 모습과 특산물을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습니다.
휴양지가 아닌 여행지로 서구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아시아 국가 역시 일본이 단연 톱입니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서구화의 길을 걸은 일본은 개항 이전부터 적극적으로 자국의 문화를 서구에 홍보하고 서구인의 방문을 허락하였습니다. 해군 장교로 나가사키에 한 달 정도 체류한 피에르 로티(Pierre Loti)는 자신이 다녀온 일본을 아주 신비롭고 멋들어진 나라로 포장하여 ‘국화부인’(1887)을 출간합니다. 이런 풍의 서적은 일본에 대해 환상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국화부인’을 기본 골격으로 존 롱은 소설 ‘나비부인’을 출간하는데, 이걸 각색한 것이 푸치니의 ‘나비부인, Madama Butterfly’입니다. 서구인은 일본을 ‘예술의 나라’ ‘도의 나라’ ‘선불교의 나라’로 인지하고 그런 모습을 찾아 일본을 방문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로 도쿄, 오사카를 여행하는 것과 달리 서구인들이 교토를 많이 찾는 이유입니다.
오랫동안 오사카에 체류했던 저도 자주 교토를 찾았습니다. 근처 어느 도시보다 미술관, 박물관, 사원, 사찰도 많고 운치 있는 정취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교토를 여행하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 1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키오미즈데라(清水寺)’를 가보셨겠지만, 저는 교토 철학의 대부 니시다 키타로(西田幾太郎)가 매일 사색을 하며 걸었다고 알려진 ‘테츠가쿠노미치(哲学の町)’를 가장 좋아합니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의 거리도 좋지만 주변에 난젠지(南禅寺)와 같은 사원, 사찰이 밀집한 ‘테츠가쿠노미치’를 짙게 단풍이 드리운 11월에 걸으면 가을의 쌀쌀함이 가슴 속 깊이 스며들어 온몸에 전율이 느껴질 겁니다. 걷다가 마음에 드는 찻집에서 차와 달달한 당고(団子)를 즐겨보는 것도 좋습니다. 이곳을 빠져나와 좀 더 위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정토종의 사원 안라쿠지(安楽寺)가 나오는데, 사원의 마루에서 바라다보는 고즈넉한 정취는 교토의 그 어느 유명한 사찰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눈에 가득 단풍을 담았으면 버스를 타고 교토의 번화가 ‘시조카하라마치(四条河原町)’로 갑니다. 유명백화점과 쇼핑타운을 조금 벗어나면 술집과 음식점이 밀집한 교토를 대표하는 가모강 (鴨川)이 나옵니다. 가모강은 실제로 보면 왜 그렇게 유명한지 잘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자그마하고 평범한 강입니다. 그런데 이 가모강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건 그 강을 끼고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2층 목조건물입니다. 여름이 되면 탁 트인 베란다에서 빨간 호롱을 켜놓고 강바람을 쐬며 여름의 정취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런 정취, 일본말로 ‘후제(風情:풍류)’ 때문에 유명해진 강입니다.
가모강을 끼고 작게 나 있는 골목이 폰토쵸(先斗町)입니다. 이곳의 지명은 앞을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폰타(ponta)’와 다리를 의미하는 ‘폰테(ponte)’가 합쳐져서 만들어졌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작은 골목들과 운치 있는 전통 목조건물 앞에 심어진 버드나무, 좁디좁은 골목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술집들에서는 교토에서만 맛볼 수 있는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로리(囲炉裏)가 있는 작은 이자카야(居酒屋)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나이 지긋한 마스터, 혹은 아주머니의 ‘오이데야스(おいでやす: 이랏샤이마세(いらっしゃいませ)의 교토 사투리)’가 귓전을 타고 들어올 것 같습니다. 잠시나마 약 백 년 전으로 시간을 돌려놓은 듯한 이곳의 느낌이 참 좋습니다.
아마도 그런 이국 취미가 사람들을 교토로 불러들이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 이자카야가 들어선 것은 1712년경으로, 근처에 ‘차야(お茶屋)’가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찻집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요정으로 손님이 오면 마이코(舞妓)나 게이샤(芸妓)를 불러 춤과 술, 음식으로 유흥을 즐깁니다.
마이코(舞妓)나 게이샤(芸妓)는 원칙적으로 매춘은 하지 않기 때문에 손님이 유녀를 부르기를 원하면 불러 줍니다. 거기서 ‘예를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다(芸は売っても身は売らぬ)’란 말이 생겼다고 하네요. 지금도 기온에는 유명한 ‘차야(お茶屋)’가 남아있어 교토 요리(京料理)를 먹으며 게이샤들과 즐기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지역의 고급 여관과 달리 교토의 전통 여관은 가격이 그다지 비싸지 않으면서도 회원의 추천이 없으면 숙박이 어렵다고 합니다.
전통과 운치로 가득한 교토는 특히 밤이 아름다운 도시인듯 합니다. 카하라마치와는 좀 떨어져 있지만 너른 대나무숲과 아름다운 강가의 풍경, 전통 여관, 인력거 등이 있는 아라시야마(嵐山)도 좋습니다. 이번 가을 계절마다 서로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교토의 밤을 걸어보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