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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경 Jun 28. 2022

내가 낯설어지는 순간이 우리에게도 온다.

치매라는 말 대신 

최근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어떤 어르신이 어차피 이번 생에는 이루지 못할 꿈이지만 그래도 꼭 한번은 해보고 싶었던 꿈에 도전한다는 내용의 드라마가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기억이 하나씩 사라질 거라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이 온 힘을 다해, 한정된 시간을 밀도 있게 살아가는 삶의 여정을 시작하는 이야기를 보며 ‘기억하다’라는 의미를 되새겨보게 됩니다.



누구든 혼란과 불안을 피할 수 없는 것이 나이 듦이겠지만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나로 살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소망일 겁니다. 얼마 전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 원로배우가 치매에 걸려 프랑스에 방치가 되어 있다는 의혹이 일어 국민청원까지 등장하는 일도 있었죠.



우리는 당당하게 늙음을 맞이하고 싶고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을 몰두하고 싶고 나답게 살다 죽고 싶다는 소망을 품습니다. 치매란 후천적으로 인지 기능의 손상 및 인격의 변화가 발생하는 증후군으로, 내가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 나의 의지로 가늠하기 어려워 어쩌면 우리에게 암보다도 더 커다란 공포를 주기도 합니다.



치매라는 말을 사용하기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노망(老妄) 혹은 망령(妄靈)이 든다는 말을 사용했죠. 여기서 망(妄)은 어그러지다, 망령되다는 뜻을 지닌 한자로 나이가 들어 어그러졌다, 영혼이 흐트러졌다 등의 의미로 사용하였던 거죠. 그러다 일본에서 통용되던 치호우(ちほう, 痴呆)라는 말을 우리말로 발음해서 노망 대신 ‘치매’라고 부르기 시작한 거죠. 아마 뭔가 더 의학적이고 전문적인 용어처럼 들려서였을 겁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에서 치매라는 말 대신 알츠하이머(アルツハイマー)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만 알츠하이머도 치매의 일종으로 그 외에도 혈관성 치매, 전두측두엽 치매, 알코올성 치매 등이 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치매라는 단어는 1719년 최초로 문헌에 등장하지만,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서구문화가 수용되던 일본 근대, dementia, Dement의 번역어로 ‘미칠 광(狂)’자를 피하고자 ‘치호우(痴呆)’라는 말을 문헌에서 찾아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30년경에는 치매에 걸린 주인공을 그린 문학 작품이 등장하는 등 의학용어처럼 사용되다가 1980년에 노인 의료가 체계화되면서 공식적인 의료용어로 정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치매(痴呆)의 치(癡)와 매(呆)는 두 글자 모두 ‘어리석다’, ‘미련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한자로 이 병에 걸리면 엄청나게 어리석고 미련해진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망(老妄) 혹은 망령(妄靈)보다도 훨씬 더 차별적 의미가 담긴 말을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일본어에서 빌려 사용한 겁니다. 



일본에서는 2004년부터 공식적으로 치매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대신 인지에 문제가 생기는 증후군이라는 의미의 닌치쇼우(にんちしょう, 認知症)로 변경해 사용하도록 하는 법령이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공식적으로는 닌치쇼우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지만, 용어 하나 바꾼다고 이 병에 대한 편견, 오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죠.



사실, 일본에서는 치매라는 말 대신 오랫동안 보케(ぼけ・惚け・呆け)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해 왔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요즘 노망(보케,ぼけ) 나서(うちのおばあちゃんが最近ぼけちゃって)”, 뭐 이런 표현을 사용했던 거죠. 보케(ぼけ)라는 말은 치매 환자만이 아니라 뭔가 엉뚱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거나 어리숙한 태도나 말 등을 의미하는 보케루(ボケる)라는 동사에서 온 말로 어원적으로는 ‘늙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뿌옇게 보인다.’, ‘일부러 모른 척한다.’라는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이 말은 일본의 전통적인 코미디 양식인 만담에서 가장 많이 듣습니다. 일본의 만담에서는 시니컬하고 진지한 역할을 하는 역할을 ‘츹코미(ツッコミ)’, 살짝 문맥에서 벗어나게 어리숙한 대답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역할을 ‘보케(ボケ)’라고 하여 사용합니다. 이처럼 보케(ボケ)는 문맥에서 살짝 벗어나 어리숙한 대답을 해서 보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역할입니다.

치매가 아닌 인지증


우리 할머니가 보케(ボケ)인가 보라고 하면 나이가 드셨으니까 뭘 잘 깜박하시는구나라고 가족도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이해하지만 치매, 인지증이라고 하면 서둘러 병원에 가거나 요양병원에 입원이라도 시켜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치매를 치료가 가능한 병으로 규정하여 의사의 처방으로 약을 복용해서 증세를 약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본 삶에서 살짝 벗어나는 보케(ボケ) 정도로 보아준다면 우리는 노년을 조금은 두렵지 않게 조금씩만 벗어나며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도 위에 있는 길에서 길을 잃어도 두렵지 않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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