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낯선 단어 하나가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바로 「손타쿠(忖度,そんたく)」입니다. 상대방이 구체적으로 어떤 지시나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그 사람이 원하는 방향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손타쿠」는 2017년에 「신조어, 유행어 대상(流行語大賞)」을 차지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는 의미이지만, 이 말이 유행하기 전에는 매우 생소한 단어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손타쿠(忖度」 는 쉽게 말해 ‘알아서 긴다’는 건데, 고 아베 신조 총리의 부인 ‘아키에(昭惠) 스캔들’로 재조명된 단어입니다. ‘아키에 스캔들’은 당시 총리로 재임 중이던 아베의 부인, 아키에가 명예 교장으로 있던 오사카 사학재단 모리토모(森友)학원이 국유지를 감정평가액보다 무려 8억엔이나 싼값에 매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부와 아베의 부인이 연루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거기에 일본 국제민간협력회 이사, 마쓰이 산부로 교토대 명예교수가 케냐에서 할 위생개선사업의 자금지원을 받기 위해 아키에 여사와 면담을 했는데 "그날 바로 8천만 엔의 예산을 얻었다는 발언으로 아키에 여사가 정부 예산 지원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기정사실로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주요 언론을 통해 모리토모(森友)학원의 국유지를 매각 계약결재 문서 14건을 일본 재무성이 조작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보도를 나왔습니다. 서류들에는 '본건(本件)의 특수성', '특례적인 내용'이라는 문구와 복수의 정치인과 아베 총리의 부인 아키에(昭惠) 씨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국회에 제출될 때는 삭제되었다고 합니다. 아키에 여사를 내세운 특혜였다는 거죠. 야당과 언론은 문서 조작과 관련해서 아베 총리와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의 사퇴를 촉구했지만, 결국 계약 당시 재무성 국장이었던 사가와 노부이사(佐川宣壽)의 사퇴와 계약을 담당한 긴키(近畿)재무국의 직원들만 징계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에 한 야당 의원이 “재무성이 「손타쿠(忖度)」 한 게 아니냐”고 추궁합니다. 아베가 직접 지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재무성 공무원이 아베의 의중을 헤아려 해당 학원에 특혜를 준 게 아니냐는 건데 아베 총리는 “「손타쿠」는 분명히 없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이 사건으로 자민당의 콘크리트 지지층마저 등을 돌리며 아베 내각 지지율은 10% 급락하게 됩니다.
딱히 영어로 번역할 말이 없는 「손타쿠」에 대하여 일본인 통역사는 “read between the lines(행간 읽기)”라고 번역했지만 미묘한 뉘앙스를 이해하기에는 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상대의 의중을 헤아려 눈치껏 움직이는 「손타쿠」 문화는 일본 정계뿐 아니라 문화계, 언론계, 학계를 막론하고 널리 퍼져있는데, 일찍이 일본 사회평론가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는 ‘공기의 연구(空氣の硏究)’(1977)에서 일본은 그 무엇도 아닌데 그 무엇보다 강력한 「공기(空気)」라는 것이 사람들의 행위를 규정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분위기 파악 좀 하라는 건데, 공기(분위기)를 잘 읽고 행동하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할 거라는 불안과 공포가 일본에서 만연하여 암묵적으로 알아서 분위기 파악하고 행동한다는 건데 그게 바로 「손타쿠」 아님 뭐겠습니까.
야마모토는 책에서 “공기는 정말 절대권력을 지닌 요괴이다. 일종의 ‘초능력’일지도 모른다. 이 ‘공기’의 정체를 파악하지 않으면, 향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을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얼마 전 일본 연예기획사 「자니즈」 창업주에 의한 연습생 성 착취가 지속하여 일어났지만, 장기간 보도되지 않고 방치된 배경엔 '손타쿠'(忖度)가 있었다는 증언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40년, 야마모토의 분석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 일본 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지금도 일본인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덕목은 「공기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니 말이죠.
한국의 정치판을 보고 있노라면 「손타쿠(忖度」가 일본만의 특수한 문화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선 전 녹취록에서 김건희 여사는 “우리가 안 시켜도 알아서 경찰들이 알아서 입건해요, 그게 무서운 거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권력자에게 ‘알아서 긴다’는 걸 권력을 가진 사람은 안다는 거죠. 국민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에 의구심을 품는 건 검찰총장이 수사라인에 배제됐다고 해도 인사권을 가진 검찰총장의 눈치를 일선 검사들이 볼 수밖에 없다는 건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또한 ‘30년 지기의 당선을 보는 게 소원’이라는 문 대통령의 뜻을 헤아려 청와대 참모들이 관여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는데, 아베처럼 내가 직접 지시하지 않았으니 난 상관없다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출세와 자리보전 욕심에 눈이 멀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서류를 조작하고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윗선에서 부정한 일을 지시한 적도 알지도 못했다고 하는데 조작과 은폐, 담합 등과 같은 비리가 발생했고, 그 비리로 바로 그 윗사람이 막대한 이익을 보았는데도 나는 모른다, 가신들이 그냥 알아서 한거다, 그러니 그 윗선은 아무 죄가 없다, 처벌해서는 안된다고 할 수 있을까?누군가의 말대로 「손타쿠」는 내 손에 피를 묻히기 싫은 윗선과 경제적 이득을 얻고자 하는 아랫사람의 이해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도덕적인 윗사람을 비리를 저지른 사람처럼 만들어 놓고 출세하는 게 이상하니까요.
그러니 손타쿠가 일어났다고 의심되면 제대로 조사하여 책임을 물어야합니다. 그 윗선은 억울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자신으로 억울한 사람이 생기고 부정이 일어났다면 당연히 책임있는 결단,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법적으로 지시하지 않았다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겠지만 도의적 책임이라도 져야 마음대로 아랫 사람이 손타쿠를 하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손타쿠」의 압력에도 소신 있게 행동해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를 꿈꾸는 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너무 동화 같은 이야기일까요? 그래서 우린 정의가 구현되는 스토리를 영화 같은 이야기라고 하나 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꿈을 꾸게 해주는 정치인들이 등장해주길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