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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경 Feb 05. 2024

원수일의 ‘이카이노 이야기’와 일본 속 제주

오사카의 코리아타운, 이카이노





책상을 정리하다 우연히 재일한국인 작가, 원수일(元秀一) 씨의 ‘제주도에서 온 여인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카이노 이야기』(1987)를 발견하고는 오래전 헤어진 연인의 사진을 본 듯이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습니다.

 제가 일본 유학을 위해 첫발을 디딘 곳은 지금은 이쿠노쿠(生野区)입니다.



일본에 도착한 8월 어느날 그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낯선 땅에 와서 당황할 저를 위해 팔순을 바라보던 제 고모할머니는 어렵싸리 이웃집 젊은 총각에게 부탁하여 공항까지 차를 빌려 마중을 나와주셨습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차창을 내다보고 있는데 저를 위한 배려인지 당시 일본에서도 인기가 있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이라는 노래를 틀어주었습니다. 할머니 댁은 ‘이카이노’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선명한데 주택가들 사이에 술집들이 있고 그것도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열어 좀 낯설었습니다. 나중에 이런 곳을 이자카야라고 한다는 걸 알았지만 말이죠. 유난히 이쿠노쿠에는 술을 파는 식당들이 많았는데 그건 이카이노 주변에 흔히 마찌꼬바(まちこうば, 町工場)라고 불리는 영세공장들이 많기 때문일 겁니다.




여기가 아주 옛날부터 ‘돼지를 기르는 들판’이라는 의미의 이카이노(猪飼野)로 불리던 곳입니다. ‘이카이노’라는 명칭은 지난 1973년 사라져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엄연히 실존하는 오사카 최대의 재일한국인 밀집 거주지역으로 제주 출신 한국인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카이노’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곳은 1900년경부터 바다를 건너 지배국의 땅으로 건너온 조선인이 살기 시작했던 곳입니다. ‘이카이노’가 조선인 집단 거주지가 된 것은 이쿠노를 가로지르는 히라노강(平野川)의 하천공사가 진행된 1919년부터입니다. 비만 오면 범람하는 히라노강 공사현장에 값싼 조선인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는데, 공사가 약 40년 동안 진행되면서 그대로 그곳에 눌러앉은 조선인 건설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이후에도 거주환경이 열악한 이카이노 주변에 영세 소규모공장이 들어서면서 저임금노동자의 수요는 더욱 늘어납니다. 그러면서 ‘이카이노’에 최초의 조선인 부락(朝鮮町)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이카이노에 특히 제주 출신이 많은 건 1923년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정기선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가 개설되면서부터입니다. 원작가의 말대로 ‘일본국 이카이노’라는 주소만으로도 제주에서 보낸 우편물이 배달될 정도로 제주 사람들의 집단 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가 왕래한 지 1년. ‘이카이노’의 조선인들의 집단 거주지 속 제주 출신 비율은 60% 이상에 달했습니다. 제주 출신 제 어머니도 이 배를 타고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함께 제주에서 오사카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공습이 심해지던 1945년 다시 이 배를 타고 고향 제주로 돌아왔습니다. 이내 바로 오사카로 돌아가려 했는데 미국의 공격으로 기미가요마루가 폭격을 당하면서 저의 어머니는 제주에 남게  된 겁니다.




‘이카이노’에 조선인 집창촌이 만들어지자 자연스럽게 조선 시장이 생겼습니다. 예로부터 생활력이 강한 제주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무허가 좌판을 펼치고 직접 채취한 전복, 미역 등의 해산물, 김치, 된장, 생활용품 등을 팔았습니다.


1993년부터 코리아타운으로 명칭이 변경되기 전까지 조선 시장으로 불린 이 시장에는 평소에는 한국요리의 식자재를, 명절이나 제사 때에는 제수 음식의 재료 등을 사는 시장으로 성장했습니다. 조선 시장 근처에 살았던 저도 이곳에서 김치, 콩나물, 라면 등을 샀던 기억이 납니다. 고향을 떠나온 많은 한국인은 이 시장에서 한국물건만이 아니라 마음도 사고팔면서 타지에서 사는 서러움을 씻어내는 동력원이 되어주었던 겁니다.




‘이카이노’에 살던 제주 사람들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공습을 피해 저의 어머니처럼 제주로 돌아오는 일도 있었지만, 남북분단 등 불안한 한반도 정세, 일본의 귀국재산 1000엔의 규제 등으로 60% 이상이 귀향하지 못했습니다. 제주로 돌아온 사람 중에서도 4·3사태, 한국전쟁 등으로 다시 제주를 떠나 ‘이카이노’로 돌아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제주 출신 부모에게서 나고 자란 원수일씨는 가가와현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로 생후 3개월 때 오사카 이카이노로 이사 왔다고 합니다. 창작된 소설이지만 원작가는 유소년기를 이카이노에서 살던 경험을 녹여내 마치 1960년대의 이카이노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생생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재일한국인 1세들에게 ‘이카이노’는 식민지배자의 나라인 일본에서 어떻게든 살아야만 했던 절박함과 처절함이 뒤섞인 생존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원작가는 『이카이노 이야기』에서 고통스럽고 팍팍한 삶만이 아니라 억척스럽고 호탕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생활력 강한 이카이노의 재일한국인 1세 여성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제주에서 ‘이카이노’로 건너온 김옥삼과 선희 사이에 태어난 히테카짱이 주인공입니다. 선희는 1세 한국인들이 그러하듯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지만, 최소한 이곳에서 일본어 발음을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카이노’에서는 제주도 방언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1세의 제주 사투리, 거기에 오사카 사투리가 섞인 ‘이카이노’ 말로 대화를 나누는 광경은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저도 자주 그곳에서 어린아이가 자기 엄마에게 ‘잔소리샨토이테'(しやんといて잔소리하지마)'라는 한국어+오사카사타투리가 섞인 말을 듣곤 했습니다.



원작가는 책에서 ’이카이노‘를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일본국 이카이노’라는 주소만으로도 제주에서 보낸 우편물이 배달되던 마을에서 자란 나는 금세기의 반환점이던 1950년에 태어났다. 1950년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이기도 하다. 그 2년 전인 1948년에는 제주도에서 이른바 ‘4·3사건’이 일어났다. ‘4·3사건’과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어쩌면 나는 제주도 어딘가에서 자랐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제주도는 부모님의 고향이기 때문이다……나는 이카이노에 집착한다. 하기야 이카이노라는 지명은 1973년에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실제 제주 사람들은 지도에서 사라진 이카이노 땅에서 여전히 꿋꿋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행여 오사카에 가실 일이 있으시다면 남바. 도톤보리도 좋지만  JR칸죠선(環状線) 모모다니 역(桃谷駅)에 내려 조선 시장도, 히라노강도 한번 보고 오시기 바랍니다. 


 제가 선배들이 있는 도교가 아니라 이곳으로 학와서 잘했다...라고 느낀 순간이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씨 등이 참여하는 4.3 위령제가 이쿠노구민센터에서 열리는데 그 사회를 제가 보게 되었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그동안 가슴 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4.3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공산당으로 몰려 처참히 돌아가신 가족의 이야기. 이카이노에 살았을 적 이야기 등을 말해주던 순간입니다. 어머니에게 일본에서 살았던 기억은 누구와도 공유하지 못한 그런 이야기였을테니말이죠.   늦동이라는 말이 없었던 시절 마흔이 다되어서 절 낳고 그저 가여워만하신 어머니....평생을 고향을 잃어버린 듯 살아온 어머니가 말년에 고향을 다시 찾고는 열 대여섯의 소녀처럼 이야기보따리를 꺼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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