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어쩌다 일본에 와서 NHK가 주최하는 일본의 연말 마무리를 책임지는 ‘홍백가합전(第75回 NHK紅白歌合戦)’을 보게 되었습니다. 매해 12월 31일, 저녁 7시 20분부터 4시간 30분에 걸쳐 일본의 최정상의 남녀 가수가 백팀(남성팀)과 홍팀(여성팀)으로 나눠 노래 대결을 펼치는 음악방송인 ‘홍백가합전’은 올해로 75회를 맞이했습니다. 그 말은 50년이 넘은 장수프로그램이라는 의미인데, 최근까지도 30%대 시청률을 유지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일본에 살 때는 12월만 되면 NHK가 주최하는 음악프로그램인데도 ‘홍백가합전’에 누가 라인업되는지, 등장 가수들이 어떤 준비를 하는지, 어떤 노래를 부르는지에 대해 타 방송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두고 일일이 보도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어느 해인가는 미국에서 살다 온 젊은 가수가 ‘홍백가합전’ 출연을 거부했다는 게 엄청난 뉴스가 되기도 했습니다. 유학생인 저로서는 제가 좋아하는 가수가 거의 나오지 않는 이런 음악프로그램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죠. 매해 같은 포맷에 비슷한 가수와 배우가 나오는 저런 프로그램을 온 가족이 보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저에게도 가족이 생기고 연말을 혼자가 아닌 아이들과 보내면서 왜 온 가족들이 둘러앉아 ‘홍백가합전’을 보는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연말특집방송은 대부분, 연예 대상으로 편성되는데, 그해 가장 잘 나가는 가수나 배우들을 수상하는 거로 그해 히트한 드라마나 영화, 가수에 관심이 적은 부모세대들은 그런 방송이 재미있게 느껴질 리 없습니다.
그러다 구정에는 부모님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민요나 트로트 특집을 내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TV를 보아도 누군가는 소외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에 비해 ‘홍백가합전’은 아주 오래된 엔카 가수부터 포크송, 10~20대에게 인기 있는 힙합 그룹, 아이돌 가수, 댄스 가수, 록밴드 등 그야말로 어린 친구부터 MZ세대, 중장년층까지를 아우르는 가수들이 총출동합니다. 올해는 홍백가합전에 47번 출연한 일본 국민가수 이시카와 사유리(石川さゆり)가 지난해 1월 지진과 9월 폭우로 총 300명 이상이 사망한 노토반도의 지역주민을 위해 히트곡이 아닌 1977년 발매곡 ‘노토반도(能登半島)’를 선보였습니다.노래로 국민을 위로 한 겁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유명인들을 추모하는 자리도 갖었습니다. 그건 일본인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치인, 배우, 가수, 운동선수, 사상가 등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추모입니다.
노래선곡도 우리의 연말특집과는 아주 다릅니다. 1년을 결산한다기 보다 100년을 혹은 50년을 결산하기도 합니다. 올해는 100년의 역사를 결산하며 일본의 변화와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출연진으로는 그해 유행한 노래만이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노래가 등장합니다. 올해는 특히, 틱톡·인스타그램 등에서 세계적 인기를 얻은 곡 ‘블링방방봉’을 비롯하여 90년대를 대표하는 록그룹으로 저도 엄청나게 좋아했던 B’z의 첫 출연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너무 반가워 벌떡 일어나 따라부르며 딸에게 이 그룹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는데 이어서 제 딸이 좋아하는 최근 가수도 나와서 그 가수의 노래도 같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새삼 이 방송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된 거죠. 그러면서 세대 맞춤형 방송이 어쩌면 우리를 더욱 갈라놓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취향대로 골라 듣고 보는 유튜브로 세대, 이념도, 취향도 자신이 원하는 것만 취하는 것이 아닌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른 세대의 것들을 접하다 보면 조금은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보면서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일본의 가족들은 이 방송을 보면서 새해의 안녕을 기원하며 소바(토시코시)를 먹고 이 방송이 끝나는 11시 40분경에는 근처 신사에 가서 새해 첫 신사참배를 드립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신사의 입구에는 따뜻한 감주부터 술, 야식 등을 판매합니다. 참배가 끝나고 돌아와 새벽잠을 잔 후 아침에는 복을 부르는 오세치 요리를 먹습니다. 그리고는 설날 아침에 배달되는 연하장을 읽어보는 거죠.
이런 단순하지만 소소한 행사가 많아 연말연시는 가족이 없어도 누구나 참여 가능한 충반한 연말 행사입니다. 혼자서 ‘홍백가합전’을 보고 소바를 먹었어도 조금만 집 밖을 걸어 나가면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신사에서 새해 분위기를 만끽할 수도 있으니, 가족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우리네 새해풍습보다는 좀 덜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때로는 다 바뀌는 게 좋은 건만은 아닐 겁니다.
혹여 일본에 여행하실 일이 있다면 일본의 대도시가 아닌 좀 벗어난 곳으로 가보시면 어떨까요? 큐슈 강추입니다.
우리에게는 거북감이 느껴질 수 있는 신사참배이지만, 정치적으로 첨예한 야스쿠니 신사를 제외하면 일본인들에게 신사참배는 그야말로 무병 무탈을 기원하고 좋은 인연을 기원하는 단순한 의식행위입니다. 그러니 일본인의 새해 풍습 정도로 이해하셔도 될 듯합니다. 2025년은 국내외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편안한 한 해가 되길 간절히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