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곧 음력설이 다가오는데 안녕들 하실까요. 이미 새해가 시작되고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다시 새해라는 게 심정적으로는 확 와 닫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설날 하나를 덤으로 하나얻은 것 같아 그저 좋습니다. 일본과 달리 봄이 와도 문 앞에 ‘입춘대길’을 붙이는 집도 점차 사라져가는 우리에게 두 번의 설은 그저 그런 연휴가 아닌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일본에서는 긴 연말·연초 연휴가 끝나는 첫날 아침, 유명 백화점 앞에는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후쿠부쿠로를 사기 위한 겁니다.
후쿠부쿠로에는 비록 재고물건이 주로 들어 있기는 하지만, 판맷값의 약 3배 이상 정도의 물건이 들어 있습니다. 후쿠부쿠로를 사는 마음은 평소에 갖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서 사지 못했던 걸 두 손 가득 담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죠. 그런 고객들의 마음에 보답하듯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은 물론 동네 작은 가게들도 천엔, 삼천엔, 오천엔, 만엔, 비싼 건 이만엔 정도의 후쿠부쿠로(복주머니, 福袋)라는 선물꾸러미를 판매합니다.
후쿠부쿠로는 의류가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식품, 가전, 침구류 등 다양한 후쿠부쿠로가 등장했습니다. 버블기에는 피카소의 회화가 들어간 고가의 후쿠부쿠로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후쿠부쿠로가 시작된 건 1700년경부터라고 합니다. 당시, 도쿄의 상인들은 1년 동안 애용해 주신 고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새해에도 더욱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싸게 물건을 할인하여 판 게 기원이라고 하네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백화점, 미츠코시백화점(三越百貨店)의 전신인 도쿄의 비혼바시(日本橋)의 포목점, 에고야(越後屋)가 겨울에 팔다 남은 물건을 정월에 할인해 판매했는데 꽤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은 히로시게(広重)의 우키요에에도 남아 있습니다.
후쿠부쿠로의 기원을 칠복신의 하나인, 장사의 신, 에비스(恵比寿)신이 들고 다니는 주머니, 「에비스부쿠로(恵比寿袋)」에서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다이마루백화점(大丸百貨店)의 전신인 다이마루야(大丸屋)에서 에비스 신을 모시는 10월 20일의 「에비스코(恵比寿講)」와 정월 초 장사를 시작하는 첫날에 재고를 봉투에 넣어서 싸게 팔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죠.
후쿠부쿠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에도시대에 기모노를 판매하던 장사꾼들이 유행이 수시로 바뀌는 기모노의 재고를 처리하기 위해 복주머니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 바겐세일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재고처리도 이렇게 기분좋게 팔 수 있다면 사느느 사람도 파는 사람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거 같네요.
후쿠부쿠로가 대중화된 건 역시 메이지 시대 이후입니다. 1907년, 백화점 마츠야(百貨店 松屋)의 전신이 되는 ‘쓰루야 포목점’에서 후쿠부쿠로 판매를 시작했는데 꽤 호응이 좋자 다른 백화점들도 후쿠부쿠로를 판매하면서 지금의 후쿠부쿠로 문화로 정착하게 된 거죠.
크리스마스 선물 보따리처럼 커다란 봉투에 예쁜 리본을 달아 파는 후쿠부쿠로는 안에 어떤 상품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어 좀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래서도 뭐 나올까 하는 기대감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그게 후쿠부쿠로의 매력 중 하나죠. 그리고 일종의 한 해의 운을 시험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어떤 물건이 들어 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후쿠부쿠로를 파는 가게의 물건을 넣은 것이니 완전히 예측할 수 없는 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옷을 파는 가게의 후쿠부쿠로는 남성용, 혹은 여성용, 그리고 사이즈별로 판매하고 있으니 혹시라도 자신이 평소에 입고 싶었던 옷이 들어 있으면 완전 득템이겠죠.
그런데도 뭐가 나올지 모른다는 거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최근에는 어느 정도 내용을 알려주는 후쿠부쿠로가 유행한다고 합니다. ‘손해 보고 싶지 않아’, ‘불필요한 것을 사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안에 내용을 살펴보고 자신의 취향인지, 사이즈는 맞는지 살펴봄으로 실패 없는 쇼핑을 할 수 있게 된 거죠. 백화점에 따라서는 고급 복주머니나 체험형 복주머니를 판매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또, 내용이 보이는 투명한 봉투에 넣고 있거나, 인터넷상에서 내용물을 상세히 기재하거나, 스스로 갖고 싶은 내용물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후쿠부쿠로도 판매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후쿠부쿠로는 상인이 손님에게 알리고 싶은 상품을 넣거나 재고를 처리하려고 만든 건데, 내용물을 보고 고객이 선택하는 거라면 고객이 좋아하는 것만 넣어야 하니 재고 처리도 안 되고, 좋아해주길 바라는 상품을 넣는 도전도 어려워지겠죠. 사는 사람도 좀 더 싸게 원하는 걸 얻는다는 의미 정도이지, 뭐가 나올까 하는 설레임은 없는 거죠.
안전하지만 두근거림이 없는 선택, 기대에 찬 두근거림이 있지만 꽝일 수 있는 선택, 오징어 게임도 아니고 참 어렵습니다. 어떤 어려운 절망의 순간에도 인간이 살아가는데 마지막까지 필요한 것이 희망이라는 걸 판도라의 상자가 가르쳐주고 있는데,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희망에 운을 맡기기 보다는 재미없지만 안전한 삶을 택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무모한 도전은 어리석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그리 큰 돈이 드는 것도 아닌 후쿠부쿠로만큼은 제대로 운에 맡겨보는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