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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신지의질문

이 나라가 좋아질 것 같은가요

by 최유경

1995년에 방영되어 그야말로 초대박을 친 신세기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안노 히데아키 감독). 통칭 ‘에바(EVA, エヴァ)’로 불리는 이 애니는 통상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법칙을 따르고 있지 않다. 애니메이션으로서 파괴적’이라는 평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어려운 과학 조어용어, 추상어, 수수께끼 같은 캐릭터, 파격적인 연출 등 난해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로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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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결같이 일본인에게 사랑받는 비결은 뭘까요. 이후 그 여세를 몰아 여러 번 극장판이 만들어졌고, 지난 2021년 개봉한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Evangelion: 3.0+1.0 Thrice Upon a Time, シン・エヴァンゲリオン劇場版)은 공개되자마자 일본에서는 해리 포터를 누르고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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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니가 방영된 것은 1995년. 시대 설정은 세컨드 임팩트라고 하는 대재난 이후 지구의 인구 절반이 사라져버린 2015년 제3 신도쿄시입니다. 거대한 컴퓨터로 일사불란하게 관리 통제되는 초고도 산업도시, 도쿄를 ‘사도(使徒’라고 불리는 수수께끼 생명체의 끊임없는 습격에 에바라는 거대로봇을 조정해 물리치는 이야기입니다. 설정만 보면 데즈카의 ‘아톰’이나 미야자키 감독의 ‘바람의 나우시카’를 연상하게 하는 진부한 설정입니다.



그런데 감독은 언뜻 거대 로봇처럼 보이는 에바를 탑승형, 혹은 조정형 로봇이 아닌 인간과 교류하는 마음을 지닌 인조인간으로 설정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에바를 움직일 수 있는 건 그것과 영적으로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14세 소년·소녀들로 한정했습니다. 즉, 에바는 완전한 로봇이 아니라 조종자의 심신과 일체화함으로써 하나의 영과 육이 합치된 인공 생명체로 거듭나는 존재인 겁니다.


거기에 에바를 조종하는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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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 파이롯 3명은 여타의 만화 주인공처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싸우는 캐릭터도 아닙니다. 심지어 반 친구들은 부러워하지만, 주인공 신자는 에바를 조종하고 싶지도 않아 했습니다. 에바를 조종하는 세 명의 소년·소녀들은 모두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은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해 늘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인격의 소유자로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에바를 조종하고 사도와 싸우는 과정에서 이들의 감춰진 상처들이 하나, 둘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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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일본 젊은이들의 마음에 와닿았던 걸까요. 그건 아마 이 주인공들의 마음에 공감했기 때문일 겁니다. 1995년이라는 해는 ‘지루한 일상에 균열이 생겨 감추고 싶은 괴상한 것, 병리적 현상들’이 일제히 드러난 해였습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의 대략적인 경향은 친구가 없이 늘 혼자, 가족 단절, 그래서 다른 무언가로 도피입니다. 아마 이들 영화의 배경으로 꼽을 수 있는 건 ‘가족의 붕괴’입니다. 원래 일본영화는 가족영화가 메인입니다. 쇼치쿠라는 일본 영화제작사는 줄곧 끈끈한 가족 사랑, 형태는 붕괴하였지만 여전한 가족사랑을 그렸습니다. 물론 오즈야스지로(小津安二郎)는 그 이면의 어두운 면을 그리고 있지만 말입니다.



일본의 1995년은 그야말로 일본의 젊은이들이 처음으로 엄청난 취업난을 경험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취직 빙하기의 세대(就職氷河期), 취업 표백시대라고까지 불리던 1993년부터 2005년. 실업률이 10%, 이 중 대졸자의 실업률은 4.6%에 육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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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엄청난 고도성장을 하던 70년대에 태어난 이후 한 번도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죠. 전후 세대들이 힘겹게 이루어 놓은 물질적 풍요로움만 즐기면 좋을 것 같았던 이들이 맞이해야 하는 세상은 그야말로 엄마, 아빠가 들려주던 달콤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는 잔혹한 현실만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이들의 부모세대들은 일반적으로 패전 직후에 태어난 단카이 세대(団塊の世代, 1947~49년생)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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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사카이야 타이치(堺屋太一)의 소설 ‘단카이 세대’(1976)에서 유래된 단케이 세대의 특징은 베이비붐 세대로 우리나라의 60년대생처럼 엄청난 입시경쟁을 겪은 세대이고 정치적으로도 60년 안보투쟁, 70년대 전공투(全共闘)투쟁 등 정치, 사회적인 문제로 기성세대와 갈등을 겪으면서도 자녀들에게는 물질적 풍요를 남겨주기 위해 꽤 엄격한 교육을 한 세대입니다. 이들은 좋은 학교, 좋은 취직, 좋은 결혼을 아이들에게 암묵적으로 강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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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노력해서 좋은 고등학교, 대학에 들어갔지만, 그들에게 펼쳐진 사회는 부모들이 약속해준 그런 핑크빛 세상이 아니었던 거죠. 연공서열 종신고용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실력과 성과, 정사원의 자리를 스스로 거머쥐어야 했습니다. 가혹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취직했다고 해도 치열한 경쟁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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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것이 너무나 싫었던 신지가 에바를 탄 건 그렇게 하면 아버지가 좋아하고 자신을 칭찬해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다른 파일럿, 레이, 아스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신지를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저 너는 이 도시를 지킬 도구에 불과하다고만 말하죠


1995년, 당시 14살의 신지가 대학을 졸업해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당시 일본인들은 신지와 다른 파일럿의 모습을 자신은 찾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묻겠죠. 이 나라가 좋아질 것 같냐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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