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누굴 향해 분노하는가

by 최유경

TV 포털을 켤 때마다 가슴이 쿵쿵 내려앉는다. 오늘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이 삶의 터전이 사라질까. 악을 없애기 위해 악해져야 한다면 선한 인간일까?



'우리는 악마를 보았다'(2010)에서 김지운 감독은 주인공 이병헌이 자신의 애인을 잔혹하게 살해한 연쇄 살인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점점 악마가 돼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살인마를 바로 죽이지 않고 극한으로 몰아넣더니 결국 그의 어머니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잔혹하게 살해하며 복수를 완성한다. 하지만 악마를 처단한 후의 주인공의 얼굴은 만족스러워 보이기는커녕 슬픔으로 가득하다. 악을 없앤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미 손에 피를 묻힌 자신이 그 악마와 다르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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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절제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폭주하는 행위를 일본어로 '키레루(キレる,切れる)'라고 한다. 끊을 ‘절(切)'을 쓰는 키레루는 일본어는 ‘자르다, 끊다, 끝나다.’ 등의 의미를 지닌 동사 키루(切る)의 가능형이다. 그러니까 이 단어의 의미는 의미로서는 끊을 수 있다, 끊어질 수 있다. 자를 수 있다, 잘릴 수 있다 등의 의미로 쓰인다.



그러니 이 말을 ‘나 폭발 직전이야.’,‘완전, 열 받았어.’ 뭐 그런 뜻인 거다. 키레루의 상태를 더욱 강조된 말이 '부치키레루(ブチ切れる)'다. 이 말은 끈이나 실이 ‘뚝’하고 끊어지는 의성어 부치(ブチ)가 키레루에 더해진 표현으로 이성을 통제할 신경의 끈이 끊어져 신경이 마비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건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에서 분노의 표현방법으로 혈관이 뚝 끊어진 모습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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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레루(キレる,切れる)라는 말이 일본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8년 2월 중학생이 교사를 자살하는 사건이 계기가 됐다. 왜 그런 잔혹한 사건을 저질렀냐는 물음에 그 중학생이 사용한 말이 ‘키레루’였다. 큰 이유 없이 그냥 ‘키레루’해서 죽였다는 거다. 더군다나 이 사건의 피의자 학생이 불량소년이 아니라 평범한 아이기에 사회학, 의학, 교육학, 심리학 등 여러 분야에서 아이들의 마음을 진단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왜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아무 데나 분노를 표출하는지 그 해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은 서일본의 중학생 50명을 대상으로 화가 날 때 사용하는 무카츠쿠(ムカつく), 키레루(キレる)를 누구에게 사용하냐고 조사했다. 그랬더니 주로 교사나 부모 등 어른에게 쓴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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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0년에는 ‘키레루 17세(キレる17歳)’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아이들은 키레루했다. 그 원인을 일본 사회는 아이들에 대한 부모들의 과보호와 지나친 기대가 키레루 아이들을 양산했다고 보았다. 초등학교까지는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며 열심히 성실히 생활했지만, 고등학교 입시가 시작되는 중학교 3학년이 되면 부모들의 아이들에 대한 기대는 극에 달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들은 현실적으로 부모나 교사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는 걸 점점 깨닫게 된다. 자신을 몰아세우는 어른들에 대한 분노가 결국 아이들을 괴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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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키레루라는 말은 아이들만이 아니라 ‘제정신이 아니야!’, ‘미친 거지’ 등의 의미로 어른들의 말이 돼버렸다. 어쩌면 1990대의 10대였던 아이들이 이제는 40대 중반이 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린 지금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의 키레루(キレる,切れる)한 모습을 매일 보고 있다. 너를 죽이지 않고서는 자신이 살아갈 수 없다는 듯 독선적인 분노가 서로를 찌르고 그도 모자라 같이 편 먹고 상대방을 찌르지 않는다면 너도 악의 편이라고 몰아세우고 있다.



미야지키 하아오(宮崎駿) 감독은 '너희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君たちはどう生きるか)'를 비롯한 그의 영화에서 전쟁, 환경파괴, 범죄 등 악의로 가득한 세상을 향한 분노의 행방을 묻는다. 애니를 통해 분노를 분노로 갚지 않고 희망을 품고 살만한 세상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애니와 다르다.


희망을 품는 건 자유이다. 하지만 희망을 실현하는 문제는 단순한 믿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린 안다. 최소한 악의 편에 서지 않기 위해 우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들이 휘두른 칼에 결국 내가 베일 수 있다는 걸 매일 우린 목도하고 있다.

키레루(切れる) 이는 타인에 대한 협박이다. 그리고 정의를 가장한 협박은 범죄라는 걸 곱씹는 나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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