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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콜 May 06. 2022

퀴어의 유럽 대학 생활

- 학교 사람들 편 혹은 커밍아웃 편 -

# 0. 대학에서의 커밍아웃에 대한 고찰

 
커밍아웃을 하면 친한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질 것만 같던, 쪽팔리고 자존심 상할 것 같던 시절은 지났다. 나는 이제 받아들일 준비가 된 친구라면 남자 친구를 빌미로 쉽게 커밍아웃을 하는데, 타겟을 고르는 법을 터득해서 그런 건지 대체로 친구들은 별거 아니라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대학교에서의 커밍아웃은 좀 달랐던 게 이전 글에서 말했던 대학 집단의 특성과 Safe zone 때문이다.


유럽이라고 해서 커밍아웃이 쉬울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다.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내가 변하는 건 아니라서 그렇다. 이곳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고, 궁금한데 읽어지지가 않는다. 


한국에서처럼 살지는 않겠다 다짐하고 이곳에 와서, 오픈리 게이인 남자 친구와 함께 생활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크게 개의치 않게 되었는데, 학교만큼은 조금 달랐다. 관성처럼 지녀온 습관이 가장 먼저 내 커밍아웃에 의문을 품었다. '커밍아웃을 하고도 여전히 집단에서 존중받을 수 있을까? 만약 존중받을 수 있다면, 나에 대한 그 존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학교에서의 커밍아웃은 나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그렇다고 한국에서처럼 거짓말을 하며 학교를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 친구는 자신의 존재가 숨겨지는 것을 영 찝찝하게 느꼈고, 나도 괜히 그로 인해 곤란하고 미심쩍은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친해지기도 전에 성 정체성을 공개했다가 반응이 썩 안 좋으면?' 하는 두려움에 일단 친해지고 나면 말할까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차피 내 성 정체성으로 인해 나를 친구로 받아주지 않을 사람이라면 애초에 친해지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나는 생애 첫 초면 커밍아웃(?)을 시도하기로 했다.


끊이지 않는 고민을 떠안고 내가 이 학교에서 처음 만나고 겪은 사람들. 그들은 내 고민을 알았을 리 없지만, 오늘은 그들과의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한다.



# 1. 버디와의 만남


신입생의 정착을 돕기 위해 마련된 버디 제도는 각 학교마다 다양한 특징이 있는데, 우리 학교의 경우 기존 학생과 신입생이 1:1로 매칭 되어 다양한 이벤트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니 내가 이곳에 와서 가장 처음 알게 된 친구는 내 담당 버디였다. 내 버디는 나보다 조금 어리고 귀여운 여학생이었고, 우리는 온라인 챗으로 먼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친구는 "너는 룸메이트 없어?"라는 질문으로 나를 첫 고민에 빠트렸다. 나는 고민을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빠르게 "나는 남자 친구랑 같이 살아!"라고 말해버렸다.


초면 커밍아웃은 의외로 쉽고 효과적이다. 처음 만난 친구들과는 딱히 할 얘기들이 없어서 주로 어디 누구랑 사는지, 왜 여기에 오게 됐는지 등의 기본 프로필을 주고받는데 그럴 때마다 고민할 필요 없이 진실을 쓱 던져 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나 남자 친구랑 살아!", "남자 친구가 여기서 일해서!" 


선의의 거짓과 불의의 진실 사이에서 선택을 헤매지 않아도 된다. 뒤늦게 끙끙 앓으며 "그게 말이야... 내가 사실..."로 시작되는 고해성사의 시간을 가질 필요도 없다. 네가 질문해서 난 대답한 것뿐이다-는 뻔뻔함으로 상황을 자연스럽게 몰아붙일 수 있다. 실제로 이 타이밍을 놓친 뒤에 친해지고 나면 막상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하기가 애매해진다.


톡을 보낸 지 몇 초 만에 답이 왔다. 정적과 후회의 순간이랄 것도 없었다. 내 버디는 "오!! 같이 있으면 외롭지도 않고 좋겠다"라며 대화를 이어갔고, 나는 이곳에서의 첫 관계를 파탄 내지 않았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정말 별 생각이 없었다고, 제일 처음 든 생각은 한국에 살던 애가 어떻게 유럽인을 만났지 였다고 한다.)   



# 2. 교직원과의 만남


유럽의 대학에는 캠퍼스별로 International office (이하 국제처)가 있고 교환학생을 비롯한 모든 국제학생들은 이곳의 직원들 중 한 명이 담당 코디네이터로 매칭 된다. 내 코디네이터는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부터 다정다감한 느낌을 주시는 분이었는데 국제처에 방문해서 얼굴을 보자 이해가 됐다. 아주 인자한 인상의 엄마뻘 여성분이었다. 


우리는 신입생 OT 이후 캠퍼스에서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시며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번에는 딱히 커밍아웃의 건덕지가 될 질문이 없었다. 그럼에도 커밍아웃을 하고 싶었는데 그 이유는 그분의 인상이 너무 따뜻했고, 내가 이 학교에 지원하게 된 동기에 관해 알려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래 좋은 사람과는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렇지만 내가 커밍아웃을 할 수 있었던 실질적인 이유는 당연히 우리 학교의 Safe zone 덕분이었다.


그렇게 그분은 내 커밍아웃 역사의 최연장자 타겟이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흐뭇한 미소로 내 커밍아웃을 맞아주셨다. 나를 위협하는 것이 없는, 더없이 안전한 공간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 유럽은 좋은 곳이구나. 마음이 괜히 뿌듯했고, 어디론가 한 발짝 나아간 것 같았다.



# 3. 학과 친구들과의 만남


우리 학과는 사람이 너무 많기도 하고 한 수업에 여러 과가 같이 수업을 들어서 그런지 학과의 의미가 크게 중요치 않아 보였다. 과보다는 각자 친하게 지내는 친구 그룹이 있어서 그 친구들과 주로 밥을 먹고 이야기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버디에게 커밍아웃 성공 후 자신감이 생겼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 알게 되는 사람마다 대화가 조금 깊어진다 싶으면 남자 친구를 빌미로 커밍아웃을 해버렸다. "난 오늘 학교 끝나고 남자 친구랑 놀러 가!"


결론은 아무도 나의 성 정체성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남자 친구?! 하면서 놀라는 친구도, 신기해하면서 꼬치꼬치 캐묻는 친구도 없었고, 당황해서 동공이 흔들리는 친구나 애써 침착한 척 헛기침을 하는 친구도 없었다. 친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 너무 자연스럽게 말해버린 내 태도 때문인 건지 몰라도, 나 여자 친구랑 놀러 가!라고 대답한 것과 전혀 차이를 느낄 수 없는 태연한 반응이었다. 동성애자라고 해서 뭔가를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이 상황이 낯설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궁금해해주지 않는 게 조금 섭섭할 정도로 당연한 반응이 반복되다 보니 이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은 그리 새롭거나 낯선 게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미 몇 차례의 커밍아웃을 거쳐서 다른 친구들의 성 정체성을 확인해왔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성 정체성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물론 놀랐지만 애써 숨긴 친구가 있을 수도 있다. 놀랐다고 해도 내색하지 않음으로써 예의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라면 그건 참 친절하고 배려 있는 방향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내 커밍아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지 나는 지금까지 막상 친구가 커밍아웃을 한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딱히 그랬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반성도 되고, 이런 환경 속에서 나고 자랐을 유럽의 퀴어 친구들이 좀 부러워졌다. 



# D.C. al fine


어제는 버디와 버디의 친구, 그리고 남자 친구와 넷이서 저녁을 먹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친구가 많이 없었던 나는 항상 남자 친구의 친구만 만나다가 이제야 처음 내 친구를 남자 친구에게 소개해준 자리였다. 실은 이게 평생을 그려온, 그리고 처음 누려본 저녁식사였다. 내 친구와 남자 친구, 이 다정하고 당연한 저녁식사가 나한테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고팠고, 왜 이렇게 어려웠는지.


요즘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커밍아웃의 기로에 놓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왠지 내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 상대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그렇다. 그러면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고는 한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일로 여전히 사람들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힘들게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허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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