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세컨드, 그들만의 리그

사랑받지 못하는 본처가 되느니 사랑받는 세컨드가 되겠어!

by 조용해

술주정뱅이 아저씨가 살던 골목의 초입에는 내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이 있었다. 그곳은 작은 여인숙에 딸린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작은 피아노 학원이었는데 여인숙은 선생님네 친정식구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옆 동네의 경찰서장이 세컨드인 우리 선생님에게 차려주었다고 한다. 그 서장은 피아노 학원 집의 벽에 앳된 선생님 옆에 마지못해 서있는 듯한 사진 속의 그 남자일 것이다. 그는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는 밤에만 가끔 들르는 듯했다. 그가 다녀간 날에는 고가의 아기 장난감들이 잠든 아가의 머리맡에 어김없이 놓여 있곤 했다. 피아노 교습비를 내러 한 달에 한 번씩 엄마들이 와서 서로 선생님의 사연을 수군거렸던 덕에 학원에 다니는 웬만한 아이들은 우리 선생님이 세컨드임을 다 알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새로운 피아노 교습생이 생기면 기존의 학생 엄마가 중요한 정보라도 되는 듯이 다음 엄마에게 전해주던 탓에 거의 매달 구전처럼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음표를 배우기도 전에 ‘첩’이라는 뜻의 영어인 ‘세컨드’를 먼저 배워 버렸다. 후에 세컨드가 첩이라는 뜻이 아닌 두 번째라는 뜻이라 하여 한동안 의아해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모자란 생각에 그러면 우리 선생님이 첫 번째 첩도 아닌 두 번째 첩이라는 얘기인가 하고 잠시 갸웃뚱 했었다.


엄마들이 교습비를 내러 다녀간 날이면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서글픈 표정으로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피아노에 몸을 눕혀가며 쳐주곤 했다. 그 모습은 흡사 우는 모습인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난 모습인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처지를 자기도 어쩌지 못하는 무녀의 살풀이 같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듣노라면 그 작곡가의 훌륭함이나 곡의 느낌보다는 친정을 볼모로 잡은 앳된 선생님 옆에 서있던 서장의 무표정한 뻔뻔함과 선생님의 피아노에 눕는 듯한 몸짓이 겹쳐져 떠오르면서 슬퍼지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복잡한 심정이 된다.



***

우리집이 있는 골목 끝에는 상철네가 살았다. 상철이 할아버지가 동네의 큰 철물점을 하셔서 알부자라고 소문이 난 집이었다. 며느리, 그러니까 상철이 엄마가 암에 걸려 세상을 뜨는 바람에 상철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부산에서 스물세 살의 상철이 새엄마가 자신의 나이에 정확히 두 배인 상철이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다. 상철이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큰 재산을 상철이 새엄마네 친정에 뚝 떼어주고 상철이 새엄마를 데려 왔다고 했다. 그때 상철이 누나는 한참 예민한 17살 고2였다. 새엄마와 여섯살 차이 ...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주려는 상철이 새엄마와 그 도시락을 안 가져가려는 상철이 누나의 전쟁 아닌 전쟁으로 두 여인의 고성이 그 집 담장을 넘어온 동네를 들었다 놨다 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상철이 누나는 길드여 지지 않은 사춘기 소녀의 특유의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골목을 내달려 빠져나가고 뒤이어 상철이 새엄마가 도시락을 들고 뛰어가는 그야말로 진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그걸 보던 동네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며 상철이 새엄마를 많이 안쓰러워했다. 부산 사투리를 애교스럽게 쓰던 상철이 새엄마는 나이답지 않게 싹싹해서 부산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어 서울 생활, 까다로운 편인 우리 동네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상철이에게도 좋은 새엄마처럼 보였으며 동네 어른들에게도 살갑게 대하여 평판이 좋았다.


원래는 아이를 더 이상 낳지 않기로 하고 시집을 왔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는 시집온 지 3년 만에 승희를 낳았다. 상철이 엄마로 불리던 그녀는 승희를 낳고부터는 승희 엄마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변화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승희를 낳고부터는 어쩐지 상철이를 대하는 모습이 예전만 못하였으며 동네 어른들에게도 더 이상 친절하지 않았다. 그녀의 변해버린 태도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던 동네 아주머니들은 그 이후 엄밀히 말하면 상철이 엄마, 아니 승희 엄마는 세컨드가 아닌 후처였음에도 불구하고 뻔히 그 차이를 잘 아시는 분들이 그녀를 슬며시 세컨드의 범주에 싸잡아 표현하는 것으로 그 배신감을 대신했다.



***

엄마는 부엌 옆에 있던 방을 인부 몇 명을 동원해 조그만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방으로 개조 후 그곳에 셋방을 줬다. 그날부터 우리는 주인집이라 불리며 그 셋방과 같이 살게 되었다. 거기에는 젊은 언니와 우리 아빠 또래의 아저씨가 살았다. 언니는 탐스러운 긴 생머리에 반달눈이 귀여운 여학생이었다. 언니는 우리 지역에 있는 대학원에 다니는 대학원생이라고 했고 아저씨의 직업은... 잘 모르겠다. 우리 집 낡은 살림살이에 비해 그 언니네 살림살이는 소꿉놀이처럼 귀엽고 앙징맞았다. 그릇도 두 개 숟가락도 두 개 컵도 두 개 모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정갈하고 깨끗한 살림들이었다. 아저씨와 언니는 ‘허니’‘자기야’등의 닭살 돋는 이름으로 서로를 불렀다. 아침이면 언니는 학교를 갔고 아저씨는 어디론가 출근을 했다.


일요일 아침이면 엄마는 폭풍 잔소리와 함께 아빠랑 우리들 모두를 ‘게으른 홍 씨들’이라고 싸잡아 모독하며 두들겨 깨워 아침 8시부터 밥상 앞에 앉혔다. 그 시절 제발 일요일 늦잠 한번 자보는 게 내 소원이었다.

그 언니네는 달랐다. 언니네는 한 9시쯤 여유롭게 일어나 10시쯤이면 토스트에 우유를 마셨다. 그럴 때면 마당에서 놀고 있는 나를 불러 “ 미조야 너도 언니랑 같이 토스트 먹을래?”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언니네 넓지 않은 방에서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났다. 언니는 언니가 발명한 거라며 한쪽에는 장조림 통조림을 한쪽에는 딸기잼을 바른 토스트를 건넸다. 그때 이미 언니는 단⋅짠의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맛의 토스트는 내가 그때껏 먹어본 토스트 중에 단연 최고였다. 내가 이런 마음을 들키며 먹고 있으면 아저씨가 아빠 같은 눈빛으로 나를 보며 자신의 토스트의 반을 뚝 잘라 내 접시에 놔주었다. 토스트 3개를 만들고 나면 항상 장조림 햄이 1/3 가량 남았다. 언니는 딸기잼은 도로 냉장고로 넣었지만 통조림은 언니네 방문 앞 쪽마루에 뚜껑을 열어 놓아두었다. 이렇게 놓아두면 배고픈 도둑고양이가 와서 먹는다고 했다. 언니는 고양이가 마실 물도 옆에 놓아두었다.


언니가 한 달에 한번씩 생활비를 받으러 집에 가는 날이면 아저씨는 요 앞 구멍가게에서 오징어와 쥐포를 사들고 와 아빠와 술을 마셨다. 나는 그 옆에서 안주로 사 온 쥐포나 오징어를 뜯으며 숙제를 하곤 했다. 언니와 아저씨는 테니스클럽에서 만났다고 했다. 언니는 초보자였고 아저씨는 테니스를 잘 치는 편이어서 언니에게 테니스를 가르쳐주다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했다. 언니는 되게 부잣집 딸이라고 했다. 아저씨에게는 아내와 딸들도 있다고 했다. 작은딸이 나와 동갑이라며 나를 보면 작은딸이 눈에 밟힌다고도 했다. 자기가 이렇게 나와 있지만 아내는 좋은 여자라고 했다. 자기도 자기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그 앞에서 아빠는 말없이 술잔만 만지작거리셨다.


한날은 언니가 아저씨를 데리고 미장원에 가서 핀컬 파마를 시켜왔다. 나는 하마터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언니는 아저씨가 10년은 젊어 보인다며 좋아했다. 언니는 아저씨에게 유행하는 반바지도 사다 입혔다. 파마머리에 반바지를 입은 아저씨는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늙은 마이콜 같았다.

방 옆에 작은 주방이 있기는 했지만 요리를 전혀 못하던 언니네는 언젠가부터는 우리 집에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우리는 TV를 같이 보기도 하고 언니가 내 숙제를 봐주기도 하며 한 식구처럼 지냈다. 휴일이면 종종 통닭을 사 오거나 탕수육을 시켜 같이 먹기도 했다. 엄마의 요리를 특히 좋아했던 언니는 엄마가 요리를 하면 공책을 가져와 그 옆에서 뭐라고 뭐라고 빼곡히 적어 넣기도 했다.


그 아주머니가 들이닥친 건 어느 휴일의 늦은 오후였다. 그날도 아저씨는 탕수육을 시켰었다. 누군가 벨을 눌러 나가 보니 우리 엄마 또래의 아주머니가 낯선 이름을 대며 여기에 누구누구 씨가 세 들어 살고 있지 않냐고 물었다. 낯선 이름들이었다. 엄마가 갸우뚱거리고 있는 사이 엄마의 등 뒤에서 돈을 들고 탕수육이 왔나 내다보던 언니와 눈이 마주친 아주머니는 엄마가 말릴 틈도 없이 엄마를 제치고 문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사람의 낯빛이 그렇게 한순간에 백지로 변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곧 TV 연속극에서 보던 장면을 보게 되겠구나 라는 예상과는 달리 집으로 들어온 아주머니는 조용히 언니네 방으로 들어갔다. 언니와 아저씨도 죄인처럼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방에서 아저씨의 목소리는 나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잠긴 목소리로 때로는 사정하는 듯 때로는 단호하게 무언가를 묻는 듯했고 언니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러나 평소와는 다르게 대답하고 있었다. 원래 언니는 생글거리며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그날 언니의 목소리는 생글 거리지 않았다. 곧이어 방에서 나오는 아저씨의 손에는 작은 여행 가방이 들려있었다. 그 길로 아저씨는 아주머니를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집으로 돌아간 뒤 언니는 학교를 일주일이나 가지 않았다. 엄마는 언니가 혹시 쓰러지지 않았나 언니네 방을 자주 가서 살폈다. 언니는 한 달 동안이나 소식이 없는 아저씨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결심을 한 듯 엄마에게 와서 아무래도 자신도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며 울었다. 엄마는 말없이 언니를 안아주었다. 막 짐을 싸려는데 문 앞에 아저씨가 언니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왔다. 뭔가 복잡한 표정의 아저씨를 언니는 달려가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리고 예전처럼 다정하게 ‘자기야’를 부르며 소꿉장난을 했다.

언니가 없을 때 아빠와 술을 마시던 아저씨는 그 ‘좋은 여자’라던 아이들 엄마와 헤어지기로 했다고 했다. 아이들도 만나지 않는 조건으로 모든 것을 아내에게 주고 나왔다고 했다. 자기도 이 나이에 자기가 사랑을 위해서 이렇게 모든 것을 포기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아빠는 이번에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언니와 아저씨는 그렇게 예전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 할아버지가 들이닥치기 전까지 말이다. 우리 집에 벨을 누른 할아버지는 문을 열어준 엄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짜고짜 언니네 방으로 쳐들어갔다. 마치 예전에 와본 듯이 언니네 방을 곧장 찾아 들어갔다. 저녁시간이어서 언니와 아저씨가 함께 방에 있을 시간이었다. 할아버지는 지팡이로 언니네 살림살이를 모조리 쓰러뜨렸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그릇이며 거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는 “ 남의 집 귀한 딸을 데려다가 뭐하는 꼴이냐!” 라며 소리소리 지르시며 역정을 냈다. 아저씨를 때리셨던 것도 같다. 언니는 그러지 말라며 울며 매달렸고 아저씨는 할아버지가 부리는 행패를 고스란히 받고 서 있었다. 난장판이 끝나고 할아버지는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우셨다. 나는 어른이 그렇게 슬피 우는 것을 처음 봤다. 언니는 할아버지를 따라 집을 나섰다. 그 후로 한참 동안 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두 달 여 만엔가 돌아온 언니의 머리는 안 어울리는 커트로 잘려 있었다. 왠지 땅그지 처녀가 겹쳐 보였다. 뭔가 다급해 보이던 언니는 나중에 다시 오마고 대문까지 따라나 온 아저씨에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당부를 하며 급히 다시 사라졌다. 그러나 그 길로 언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일을 나갔다가 돌아온 아저씨는 자기가 일을 나간 사이 혹시 언니가 왔다 갔을까 봐 번번이 물었지만 언니에게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을 더 기다리던 아저씨는 이사를 나가기로 결정했다. 이사 가기 전날 엄마는 아저씨와 아빠께 술상을 차려주셨다. 그날 아저씨는 나를 술상 옆으로 불러 만원을 주셨다. 그 당시 만원으로는 종합 선물세트를 10개나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앞으로 공부 잘하고 엄마 아빠 말씀 잘 들으라고 하셨다. 술을 드시며 아빠는 이사를 나가면 갈 곳은 있나고 물었다. 아저씨는 그때 아내에게 모두 주고 나와서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불러주는 곳도 없고 갈 수 있는 곳도 없노라고도 했다. 아저씨는 언니와 만났던 시간들 동안 달리는 기차에 올라탄 기분이었다고 했다. 내려야 했는데 내릴 수가 없었다고도 했다. 기차는 멈추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혼자 남은 것 같다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앞으로는 절대 사랑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거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아저씨는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구성지게 불렀다.

아저씨가 이사를 나간 후 엄마는 대문에 이렇게 써놓으셨다.

‘세 놓음. 혼자 사는 분 환영’


***

떠돌이 처녀를 돌봐주었다던 ‘세컨드 할머니’는 동네에서 유명한 호랑이 할머니였다. 어쩌다 우리들이 그 골목에 원정을 가서 다방구 놀이라도 할라치면 조금만 시끄럽게 굴어도 불호령이 떨어졌다. 불호령으로도 아이들이 조용해지지 않으면 걸래 빤 물을 투척하여 아이들을 골목에서 내 쫓아버렸다.


이런 사나운 할머니가 순한 양이 되는 순간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방문하시는 날이 그날이었다. 할머니는 언제 할아버지가 들릴지 모르기 때문에 늘 꽃단장을 하고 있었다. 하얀 분칠을 하고 입술에는 할머니들은 잘 바르지 않은 분홍색 펄 립스틱을 수줍게 바르곤 했다. 눈은 할머니가 되서야 했음이 분명한 쌍꺼풀수술 자국이 분명하게 나있었다. 마치 눈에 살찐 지렁이가 양쪽눈에 한마리씩 올라탄 모습이었다. 할아버지가 동네에 오시는 날에는 할아버지가 온 것을 아이들도 다 눈치챌 정도로 티가 나게 호호 하하거리며 동네를 산책하셨다. 하얀색 모시적삼을 멋지게 빼입고는 꽃가라 양산을 쓰고 할아버지와 손을 잡고는 동네 사람 하나라도 더 볼 수 있게 부지런히 온 동네를 쏘다니셨다. 가끔은 귤을 까서 할아버지의 입에 손수 넣어드리기도 하고 가제 손수건으로 할아버지의 얼굴에 난 땀을 정성스럽게 찍어주기도 하며 동네 할아버지들에게는 부러움을, 동네 할머니들에게는 원성을 샀다. 지금이야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을 잡고 다니시는 모습을 보면 젊은 사람들이 나중에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로망을 가지며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다 늙어빠진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을 잡고 다니는 모습을 남사스럽게 보는 그런 시대였던 거다. 특히나 할아버지와 유난히 사이가 대면 대면했던 할머니들에게는 이 세컨드 할머니의 행태가 엄감생심 꼴불견도 그런 꼴불견이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세컨드 할머니는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으며 할아버지가 오시는 날에는 평소 호랑이처럼 구시는 아이들에게도 얼마간의 여유를 보여주셨다. 어쩔 땐 할아버지가 사 오신 사탕 중 일부를 놀고 있는 아이들을 일부러 불러들여 나눠주시는 착한 할머니 코스프레도 서슴지 않으셨다.


그 시절 우리 엄마를 포함한 본처들 사이에선 세컨드들은 그녀들이 합심해서 무찔러야 할 공공의 적 쯤이었다. 본처들 그녀들만의 세계에서 세컨드들의 존재는 절대 인정될 수 없는 종족이었으며 그래서 자기 남편의 세컨드가 아님에도 누군가의 본처로 똘똘 뭉쳐 빙의하여 세컨드들을 왕따 시키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할머니는 자신이 세컨드임을 당당하게(?) 커밍아웃을 하셨으며 그 사실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사랑받지 못하는 본처가 되느니 사랑받는 세컨드 가 되는 쪽을 선택한 것 같았다. 다만 본인의 팔자가 박복하여 아직도 본부인이 살아 있음에 조금은 기가 꺾인 모습이었다. 적게는 두 달에 한번 꼴로 많게는 한 달에 두 번꼴로 들르시던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 더 이상 할머니를 방문하지 않으셨다. 항상 고운 모습으로 평상에 나와 할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할머니의 모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동안 다정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에 심사가 뒤틀려하던 동네 할머니들은 뒤에서 고소해하며 수군거렸지만 어쩐지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것이 본처가 되었던, 세컨드가 되었던, 그 누가 됐던 한없이 처량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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