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잠 좀 잡시다.
집에 셋방을 만들어 부수입을 올려봤던 엄마는 그것만으로는 성이 안찼는지 옆집을 사서 이층을 올렸다. 아빠 친구이신 건축 업자 박 씨 아저씨가 집 짓는 것을 맡았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거짓말 안 보태고 벽돌이 한 장 올라갈 때마다 아빠와 엄마는 지겹도록 부부싸움을 해댔다. 돈이 걸려있는 문제라 보통의 부부싸움과는 차원이 다른 첨예한 대립이었다. 나는 밤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혹시라도 그들이 흥분하여 치고박고 하다가 자고 있는 내 목을 콱 밟을까봐... 그럼 너무 황당할 까봐...
엄마는 원래 외벽을 오지벽돌로 원했는데 아저씨가 건축비는 오지벽돌의 가격을 받고 일반 벽돌로 시공을 한 것부터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이후로도 난방 방식이며 창의 크기 도어록 하나까지... 집이 지어지는 일여녀의 시간 동안 우리 집은 밤마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박 씨 아저씨가 아빠 친구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아빠 탓이었다.
그즈음엔 우리 집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단층집을 이층 집으로 올리는 것이 유행을 타서 온 동네가 몸살을 앓던 시절이었다. 옆 골목 문희네도 우리 집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이층을 올렸다. 집을 짓는다는 소식을 듣게 된 나는 제일 먼저, 너희 부모님들도 그렇게 싸우시더냐고 물었었다. 문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옥이... 였지”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지옥이...’와 ‘였지’ 사이의 행간을 누구보다 완벽히 이해했다. 불쌍한... 잠깐 동안의 공감의 침묵에 우리는 한 바터면 서로 와락 껴안을 뻔했다. 그녀나 나나 소녀소녀 한 성격이 아닌 소년소년 한 성격이어서 천만다행으로 그런 닭살 돋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심리적으로는 찐하게 한번 안았다.
원래 문희네 마당에는 제법 큰 화단이 있었다. 문희네 아버지가 정성스럽게 가꾼 것으로 그곳에는 봄이면 민들레가 여름이면 분꽃이며 사르비아 꽃이 흐드러지게 가을에는 채송화가 차례로 피어나는 예쁜 정원이었다. 우리는 분꽃의 씨에서 하얀 가루를 파내서 분가루를 만들어 얼굴에 바르며 엄마놀이를 했고 사르비아 꿀을 빨아먹으며 당을 채우기도 했다. 민들레 홀씨가 자라면 서로 불며 놀겠다고 실랑이가 벌어지기 일수였다. 초여름이 되면 문희네 집 꽃밭에서 나는 장미향이 온 동네를 감쌌다. 탐스러운 커다란 분홍색 장미가 피기도 했고 핏빛 장미가 가시를 드러내며 요염하게 피어나기도 했었다. 그런 마당이 이층을 올리면서 허무하게 없어져 버렸다. 꽃향기가 가득하던 동네에는 여기저기 공사로 인한 먼지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한동안 집을 짓기 위해 쌓아 놓은 모래며 자갈이 작은 동산을 이루면서 아이들에게는 위험하지만 흥미로운 놀이터가 생겼다. 그 놀이터는 마치 시리즈물처럼 한집이 정리되면 새로운 공간이, 또 한집이 끝나면 다른 놀이공간이... 이렇게 한동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속되고 있었다.
동그랗고 커다란 콘크리트 파이프 안에 들어가 노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안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왠지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외부와 차단된 나만의 공간은 묘한 안도감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부 아저씨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재미있었다. 아저씨 둘이서 맞잡고 모래를 채에 치면 금빛 모래가 방앗간에서 쌀가루 내려오듯 솔솔 분리되어 나왔다. 재미있어 보여서 아저씨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잽싸게 아이들끼리 흉내를 내보았지만 잘 될 턱이 없었다. 아저씨가 들어 올릴 때는 가벼워 보이던 채도 우리는 들어볼 수조차 없이 무거웠다. 무엇하나 쉬운 게 없었다. 벽돌을 도미노처럼 세워서 쓰러뜨리는 놀이도 즐겨했었다. 간혹 도미노 놀이를 하다 깨진 벽돌은 어른들에게 혼날까 봐 구석에다 숨겨 놓았다가 나중에 들켜서 엄청 혼이 나기도 했다. 무슨 일이건 증인이 있기 마련이고 그 증인이 공범이면서 고자질쟁이 일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보일러를 깔기 위해 늘어놓은 파이프 사이를 폴짝폴짝 사방치기 하듯 뛰어다니는 것도 신나는 놀이 중에 하나였다.
우리 집 보다 늦게 공사를 시작한 문희네 집이 먼저 완성돼서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새로 만들어진 방이 너무 어두웠다. 실망스러웠다. 그때는 지금처럼 햇빛이 잘 드는 집이 귀한 시절이 아니어서 낮에 불을 켜야만 하는 방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옆집도 뒷집도 다들 이층들을 올리는 터에 서로서로 어두운 방을 나눠 갖던 중이었다. 어른들은 조망권이며 일조권이며 하는 어려운 용어들을 써가며 하루 종일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 집안에서는 집안에서 대로, 이웃끼리는 이웃끼리 대로 집 안팎 여기, 저기에서 싸우는 소리가 교향곡처럼 울려 퍼지던 시절이었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나중에 완성된 우리 집도 문희네 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어두워서 낮에도 불을 켜야만 하는 방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간혹 빛이 잘 드는 집을 만나면 고마워하기까지 했다. 세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우리 집이 완성되자 옆집도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 집은 완성되면 될수록 우리 집과 거의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계단의 모양도 집의 형태도 심지어 엄마가 불만에 마치 않던 외벽의 벽돌색조차도 같았다. 박 씨 아저씨가 지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똑같이 지어진 집을 보며 엄마는 디자인을 베꼈다며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옆집에 불만을 토로했었다. 그러나 다 지어진 집을 부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옆집 공사가 완성되고 보니 옆집과 우리 집의 벽과 벽 사이의 거리는 채 일 미터도 되지 않았다. 누군가 운 좋은 도둑이 있다면 한집을 털러 왔다가 두 집을 털어 갈 판이었다. 우리 집 부엌 쪽창을 열면 그 집 화장실이 집안처럼 가까이 보였다. 옆집에선 화장실에 커튼을 다는 것으로 사생활을 보장했다. 혹시나 커튼이 열어져 있는지 모르고 볼일을 보다가는 낭패가 벌어지는 거였다.
집들과 집들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그즈음 이웃과 이웃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어쩐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