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우리의 얘기를 쓰겠소

사랑에 대해 묻는 이를 만난다면...

by 조용해

이젠 섣불리 연애세포를 깨우면 자칫 망신당할수 있는 나이라 예전의 기억들을 소환해 봅니다.


저는 추억을 뜯어 먹고사는 철없는 영혼이니까요


동네 친구랑 같이 집에서 가까운 운전 학원을 다니다가 같이 시험 보던 날.

같은 날 신청해서 시험 보는 순서가 앞뒤로 이어졌었거든요. 제가 먼저 제 친구가 나중. 결승점에 거의 들어와서 나는 거의 붙은거 같은데 쟤는 잘 하고 있나 백미러로 잠깐 훔쳐보다 마지막 주차선을 밟는 바람에 아깝게 탈락.

그 이후에 시험 날짜가 중간고사에 겹쳐, MT에 걸려, 나이트 가는 날에 걸려...이런 저런 시험을 미룰 수 있는 핑계들로 인지용지를 두 장이나 바꿔가며 친구는 벌써 운전하고 다니는데 혼자 더운 날 운전학원을 꾸역꾸역 걸어 다니던 4학년 여름 방학.


군대로 치면 말년 병장쯤? 풋풋했던 싱그러움은 간대 없고 완숙한 성숙미(?) 조차 노화로 접어드는 것 같아 우울하던 어느 늦은 여름날...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그날따라 옷도 추리하고 우산은 없고 핑계 김에 후두둑 후두둑 빗소리에 맞춰 고인물을 탁탁 튕겨가며 발 장단을 맞추며 정신 놓고 한잠을 비를 맞으면서 보도불럭의 선을 밟지 않는 혼자만의 놀이에 열중하던 중.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비를 꽤 맞았더군요. 으... 끕끕해 하면서 고개를 드는데 저만치 대충 봐도 풋풋하고 앳띤 남자애가 우산을 쓰고 어울리기 쉽지 않은 꽃가라 셔츠를 입고 걸어가고 있더군요.


으이그 상큼하구나 뉘집자식인지! 어디서 저런 애 나 안 쫏아오나...?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심심찮게 따라오더니 나의 늙음을 그들도 눈치를 챈건지? 이젠 개미새끼 한 마리도 따라오는 녀석들이 없네... 라며 신세한탄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비맞은 중처럼 중얼거렸을지도 모를 순간... 동화처럼... 분명 내 앞에 있었는데 혼잣말하는 사이 제 시야에서 사라졌던 그가 옆으로 다가서며 ...


비를 많이 맞았네요?... 우리 우산 같이 쓸래요?


라며 수줍게 작업을 걸어오던 순간.


어머 우리래... 그래 이거지. 아직 죽지 않았어 전설!을 함바터면 심봤다 톤으로 외칠 뻔 했죠. 가까이서보니 맑간 얼굴 아까부터 눈에 띄던 톤다운된 그린색 하와이언 셔츠. 지금이야 남자들도 분홍색은 물론 꽃무늬도 가리지 않고 입어주지만 벌써 20년도 더 된 그 시절에는 미대생이던 제 남동생 같은 별종이나 가끔 입어주는 아이템이었죠 그런 류의 꽃가라. 그런 꽃무늬 셔츠가 근사하게 어울리던 살결이 유난히 하얗던 그 아이.


그렇게 갸와 처음 만났습니다.


강동원 우산 씬이요? 얘가 원조예요 ㅎㅎㅎ


나름 그쪽으로 노련했던 저는 오랜만에 포획된 먹잇감을 놓칠 수 없다고 판단. 일단 오락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겔러그로 몸을 좀 푼 후 서로의 심리적 거리를 자연스럽게 좁혔죠...지금 생각하면 간두 크지 비를 맞아서 얼마나 요상 쿰쿰한 냄새가 났을 거야? 냄새 어쩔 거야... 이후 커피 마시고 밥먹고, 소주마시고, 맥주마시고, 비오는 날엔 막걸리라며 마무리... 그날 얼마나 붙어있었는데,,,


알고보니 우리는 운전학원 동기. 저는 그를 처음 보는데 그는 저를 몇 번 봤었다네요. 도로 연수하면 운전선생들이 심심하니까 자기들끼리 모이는 루트가 뻔하거든요. 거기서 우리 학생들은 선생들에게 담배를 사주기도 하고 커피를 사주기도 하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지요. 심한 날은 닭백숙을 사주기도 하는...착취의 현장. 그도 거기 왔었나 보더라구요. 그날이 기억나요. 저도 무언의 압박에 못이겨 운전선생에게 담배며 커피를 사주며 내심 억울해하며 따분에 마지않던. 그도 거기 있었었다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같이 있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 서로 다행스러워하며 가는데 걷다보니 방향이 심하게 같은 거예요? 서로의 호구조사를 통해 대학이며 과며 고등학교며 중학교며 파헤치는데 제가 같은 중학교 선배더군요 음하하하 그는 제 남동생과 같은 나이. 왠지 제 정체를 밝히기 꺼려져. 제 동생이 같은 나이라고 얘기 할 순 없었어요. 좁은 학교 서로가 서로를 다 아는 동네였거든요.


둘 다 무난히 운전 연수를 마치고 면허도 동시에 따고 여러 가지 핑계를 대가며 자주 만났죠. 겨우 한살이지만 지금이야 연하가 흔하지만 제가 대학 다닐 때는 그게 흔했나요 어디... 그냥 호기심 반 그렇게 그런 관계를 즐겼던거 같애요. 그때 저는 졸업하고 연수를 가야해서 중간에 붕 뜬 시간들이었거든요. 그래서 연애 세포를 잠시 동안 꺼두기로 작정을 한 참이었는데...


그때는 휴대폰이 나오기 전이어서 집전화로 통화하던 중 제가 제 남동생 이름을 무심코 불러 버렸나봐요. 네 동생이 L이었어? 족보를 맞춰보니 제 배프의 동생 P와도 절친이더군요. 심지어 서로의 엄마 아빠도 서로 아시는. 어렸을적 동네친구들... 여자형제들만 있는집 막내라 제 남동생이랑 형같이 놀아주느라 동네친구들과 딱지치기 구슬치기 좀 했었는데 왕년에. 그때 한두번은 같이 놀지 않았을까... 나중에 우리의 관계를 알게된 P. 걔누나가 실전은 약하나 이론은 빠삭한 연애를 글로배운 저의 전담 연애코치였거든요. 때때로 남자들의 심리가 필요하면 귀잖아하는 애를 굳이 방에서 불러내서 이것저것 물어본 덕분에 저의 연애사를 대충알고 있던 그가 한마디 하더군요. K 걔 착한애다 누나. 건드리지 마라... 어쩌다 집에 바래다 주는 모습을 제 남동생에게도 들켜서 누나 어제 K랑 손잡고 집에 오더라 걔는 또 어서 알았데? 또 순진한 애 울리지마라 걔 내가 아끼는 녀석이다. 알았어 알았어 요것들아. 누가 잡아 먹냐? 주위에 팬이 많은 그와 안티팬이 많았던 저는 그래도 꿋꿋하게 만났어요.


졸업을 앞둔 백수와 복학 전 시간이 남던 우리들의 시간이 서로 맞아주어 주로 제 연수준비를 핑계로 이것 저것 준비하며 비자를 받으러 같이 가기도 하고 가서 입을 옷을 사러가기도하는 등 그렇게 겸사겸사 만남을 이어갔죠. 그러다가 저는 해외로 나가게 되었고 그렇게 저렇게 시간이 가고 저는 그를 정말 남사친으로 여겨서 그와의 시간에 부담이 없었는데 돌이켜 보면 그렇지 않은 기억들도 좀 있는거 같아요.


제게 자기집 재정 상태도 참고삼아 알려주고 자기 명의로 된 집도 보여주고 ㅎㅎㅎ 왜 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어쩌다 우리 큰언니 신혼집에 같이 갔었는데 신혼집 치곤 좀 큰 그 집을 보며 혹시 내가 이정도의 집을 원한다면 자기도 지금 준비 가능하다고 농담처럼 흘렸었죠. 그러나 저는 동생들의 열화와 같은 염려에 부응하여 그 흔한 스킨쉽 한번도 안해 봤어요 왠지 죄짓는거 같을거 같더라구요. 제 남동생얼굴이 아른거리고 그럴 것 같기도하고. 만나는 날이면 어딜 갈까 뭘 먹을까를 너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같은 모습이 귀엽기도하고 ...너무 편했는지 어느 날은 저도 모르게 하품을 했나봐요. 정말 진심으로 화를 내더라구요. 막 화내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목소리톤으로 알았죠. 아 화가 많이 났구나 ...저는 제가 하품을 했는지도 몰랐어요. 사실... 그때는 몰랐는데 가끔씩 그게 참 미안해져요. 그러면 안되는 거였어요.


동네가 좁아서 둘이 돌아 댕기다가 동네 친구들과 마주쳤는데 같이 운전학원 다녔던 친구가 같은 운전학원을 다녀놓고 저런애가 너만 쫏아 오는건 불공평하다며 진심으로 분노하던 모습이 떠올라요. 다리도 지가 더길어 얼굴도 지가 더 작아 머리결도 지가 더좋아 심지어 지는 머리숱도 많아 라면서 열폭하던 그녀 ㅎㅎㅎ 친구야 어디 연애를 비주얼로 하더냐? 쏘울로 하지 ㅎㅎㅎ


드디어 좀 있으면 가는 날이라 만나 술 마시던 마지막 날, 자기가 잡으면 안 갈수 있냐고 묻더군요. 저는 장난처럼 저를 잡을 용기는 있나고 물어봤었구요. 서로의 대답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 기억은 없고 둘다 술이 떡이되게 마신기억만 있어요. 필름이 끊기지는 않았구요. 가기 전날 제발 아프지 말라고 당부하며 바라보던 그의 아픈 눈빛은 타국에서 제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날이면 상처에 바르는 연고처럼 가끔 떠올랐어요.


그렇게 그렇게 저는 방학때 한번씩 들어오면 그를 만났고 또 돌아가면 거기생활에 충실하면서 시간이 지나버렸어요. 생각보다 오래 있게 되었던 그곳에서 귀국하고 한번 얼굴이나 볼까 하고 연락했더니 그사이 결혼을 해서 외국에 나가있다고 하더라구요. 잠깐 좀 멍 했어요. 몇 년을 연락 안 해도 그가 그 자리에 있을 줄 기대했었나봐요. 내심. 깜찍하게도...


결혼하면 꼭 자기 닮은 아이랑 부인이랑 셋이서 티셔츠 맞춰 입고 놀러 다니는 게 꿈이라던 그. 그는 지금쯤 자기 꿈처럼 그렇게 단란하게 살고 있을 거예요. 가끔 인생이 생각처럼 안 풀린다고 느껴질 때 생각한적 있어요. 그때 좀 잘해줄걸 그랬나...


이전 04화우리는 모두...한때,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