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집어든 한영의 촉촉한 눈이 이번엔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오직 대문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한영이 손에 든 칼은 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날을 날카롭게 세웠다. 한영은 그 분노의 날이 뭉툭해지기 전에 얼른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아롱이 다롱이 만만세 9부
"삼 일 후에 아버지 오신다!"
순년이 뱉은 말이 어둠 보다 더 짙은 음색으로 골목 모서리를 뭉툭하게 만들었다.
한영은 순간 하늘에서 엄청난 벼락이 정수리에 내리꽂는 것 같았다. 낭자한 정수리에서 흘러내린 모든 핏방울들이 암흑 속 골목을 헝클었다.
"엄마!"
힘없는 목소리에 절박함을 실어 보낸 한영의 목소리. 그녀는 저녁 내내 무거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영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잠을 설쳤다. 다음 날 학교로 향하는 한영의 발걸음은 가방에 책도 몇 권 넣지 않았는데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멘 것처럼 더뎠다.
그날 순년은 무엇인가 결심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를 한영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영은 엄마의 표정이 다른 날과 조금 다르게만 느껴졌을 뿐, 소풍 가서 단 한 번도 찾지 못한 보물종이처럼 그녀의 낯선 표정에서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어느 때보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던 그날, 순년은 한영의 손을 잡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어두워지려면 시간이 좀 더 남아있었지만, 도시는 일찌감치 영롱한 빛을 반짝거렸다. 한영의 눈망울 또한 어느 때보다 맑아 보였다. 시간이 갈수록 차가워지던 겨울바람은 마치 높은 산이 활시위를 당겨 발사한 화살처럼 변해갔다. 촉이 아주 뾰족한 그 화살은 사람들의 가슴에 백발백중이었다. 사람들은 상처 난 가슴을 웅크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영의 부푼 가슴을 뚫지 못한 화살촉은 낙엽처럼 길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씩씩하게 자라야 한다.우리 한영이.”
깡마르고 가슴도 없어 굴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년이 가격을 지불한 파란색 파카를 한영에게 입혀 주며 볼을 쓰다듬었다. 마지막 최후의 공격을 퍼붓듯 날카로운 화살촉을 앞세운 바람이 전 보다 거세게 밀려왔지만 따뜻한 엄마가 있어 한영은 버틸만했다.
“오늘 아빠 오시는 날이니까 학교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야 한다. 알았제.”
순년의 가슴은 차가운 바람이 핥고 간 세숫대야 속의 물처럼 가늘게 떨렸다. 겨울 등굣길에 오른 한영은 삼 일 전 엄마가 사준 파카를 입고 있었다.
“아빠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한영인 잘 알지? 제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행동하렴.”
엄마의 목소리는 하루 종일 한영의 귓가를 따라다녔다.
“가여운 것들.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노.”
수업시간 내내 공식을 잊어버려 풀지 못한 산수 문제를 잡고 끙끙거렸던 지난날처럼 한영은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세상엔 우리보다 더 아프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단다. 그러니 공부 열심히 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을 생각만 하렴. 말썽 그만 피우고 이제부터 우리 한영인 어른이 되어야 해 알았지.”
한영은 문제를 풀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고 잊어버린 공식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우리 한영이는 어른이 되면 다 이해할 거야. 그때가 되면 부디 이 못된 엄마를 용서해 주렴.”
오후가 되어서야 한영은 번뜩하고 풀지 못한 산수 공식이 떠올랐다. 그러자 빨리 집으로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판 위에 쌓이던 분필가루처럼 마음에 불안한 낙서들이 어지럽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한영아!”
여선생의 목소리가 크게 한 번 들려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빠른 걸음에 걷어차이며 희미해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한영은 아침에 걸어서 30분 만에 등교한 학교를 나와 단 10분 만에 집 앞 골목길에 닿았다. 멈추어 서자 피가 토할 것 같았다. 폭력을 견디다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걸음아 나 살려라 줄행랑을 쳤을 때마다 가슴 바닥보다 더욱더 깊은 곳에서 분수처럼 솟구쳐 올라오던 비린내가 또다시 풍겨왔다.
한영은 숨을 고르며 천천히 대문을 향해 걸어 나아갔다. 예전부터 집으로 들어설 때마다 느리게 걸으며, 늘 같은 주문을 외웠다.<제발 아버지가 죽어 없어지게 해 주세요. 제발> 하지만 그 주문은 잘못된 엉터리였던 것일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 주문에 걸려들지 않았다.
세월의 이빨에 풍화되어 처참하게 낡아버린 철대문도 흉포한 바람의 폭력과 대적할 수 없었는지, 이곳저곳 뜯겨 일어난 파란색 페인트를 초라한 자태로 드러내놓고 있었다. 곧이어 대문 앞에 서자 한영의 심장이 요동쳤다.
살금살금 걷던 발소리는 제 귀에도 들리지 않았지만 요동치는 심장소리를 아버지가 듣고 금방이라도 달려 나올 것 같아 더없이 두렵기만 했다.
“한영이 왔나.”
감옥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먼저 말했다. 아이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자 언제나 그랬듯이 머리끝이 뾰족 섰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한영은 제 속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킬까 봐 크게 말했다.
“있다가 저녁 챙겨 먹고 있어라. 아빤 어디 좀 다녀오마.”
태한이 밖으로 나가자 한영은 그제야 참고 있었던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한영은 이내 잃어버린 구슬을 찾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미선아. 엄마는?”
한영의 목소리는 마치 곧 끊어질 것 같은 낡은 외줄 위에 서있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없다. 도망 갔삤다.”
여동생의 목소리는 원망보다 짜증에 더 가까웠다. 왜 그토록 바라는 것들은 답안지를 비켜가고, 제발하고 바라지 않는 것들은 언제나 정답으로 맞아떨어지는 것일까.
“아니다. 엄마가 우리를 왜 버리노. 아니다. 가씬아야. 잠깐 어디 가셨겠지. 엄만 올 거야. 이따가 올 거다 가씬아야.”
한영은 마치 현실과 꿈의 중간 어디쯤에 끼여 있는 것 같았다. 책상 서랍에 있던 구슬이 없어졌음을 확인했으면서도 자꾸 열어 봤던 그날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엄마의 흔적을 계속해서 찾았다.
“봐라 이거. 이렇게 편지 써 놓고 갔다. 엄마는 우리 버렸다.”
동생이 건네준 편지를 다 읽은 한영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기에서 져서 빼앗긴 구슬처럼, 다시는 안길 수 없는 엄마의 품. 한영은 아버지가 감옥에 가 있던 시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나날을 떠올렸다. 처음에 아버지가 감옥에 갔을 때 이제야 하나님이 응답하여 소원을 들어준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엄마와의 행복했던 나날, 그 짧은 시간이 꿈처럼 사라지고 이제 영원한 형벌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가엾은 엄마, 나만큼이나 가혹한 아버지의 폭력을 견뎌야 했던 나의 엄마, 나의 품, 나의 집. 한영은 떠난 엄마를 티끌만큼도 원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엄마가 이제 행복할 수 있다면, 제발 그리 될 수 있다면, 엄마의 행복을 빌어야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눈시울이 더욱 뜨거워졌다. 가슴이 아렸고, 심장이 깨질 듯 아파왔다. 아버지를 생각하자니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성싶었다.
알 수 없는 죽음의 실체. 죽음은 겪어보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다만 두렵고 잔인한 것은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폭력이었다. 한영은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죽음이란 것은 어쩌면 더 이상 두려워할 그 무엇이 아니라, 해방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 죽는 게 뭔데?”
“생이 다하여 하늘나라에 가는 거지.”
“그러면 이렇게 사는 거보다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게 더 좋은 거 아냐?”
“물론 그것도 좋지만, 하나님이 주신 목숨 사는 것이 우선이야.”
“난 빨리 하늘나라에 갔으면 좋겠는데.”
“우리 한영이도 알게 될 거야. 왜 살아야 하는지.”
순간 한영은 살고 싶어졌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러자 그 순간은 아버지가 두렵지 않았다.
“아 악! 아~ 악!”
한영의 절규는 상처 많은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그 울부짖음은 더 이상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 모든 이성이 마비되어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했던가. 태한이 앞에 있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칼을 집어든 한영의 촉촉한 눈이 이번엔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오직 대문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한영이 손에 든 칼은 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날을 날카롭게 세웠다. 한영은 그 분노의 날이 뭉툭해지기 전에 얼른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