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롱이 다롱이 만만세 14부

by 김준한

온갖 것들이 한대 어우러져 세월이란 비커 안에 용해되었으나 끝끝내 용해될 수 없는 기억들이, 어느새 한영의 가슴을 흐리기 시작했다. 허공 위에도 결빙된 경사가 있었던 것일까. 행여 미끄러질까, 천천히 내려온 나뭇잎 하나가 사뿐히 바닥에 닿았다.



아롱이 다롱이 만만세 14부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물 같아서 강의 너비와 경사의 정도, 굴곡진 시절의 변화 따라 속도를 달리했다. 결박하는 운명처럼 더없이 느리게 흐를 것 같았던 시간은 마침내 오후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새벽바람의 거친 면에 날카롭게 돋아난 냉기는 여전히 닳지 않았다. 그 바람은 산을 무너트리려는 듯 계속해서 산 중턱을 파고들었다. 여린 가지를 세차게 흔드는 산은 완강하게 버텼다. 집요했던 바람. 산 등에 부딪히고, 바위에 부딪혀도, 절대 뭉툭해지지 않는 그 바람의 뾰족한 날이 한영의 가슴에 뿌리내린 파란 꿈들도 세차게 흔들었다. 중턱까지 내려오자 나무지게를 내려놓은 태한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생산이 중단된 지 꽤 되었으나 아직 소진되지 않은 재고 물량이 시골 벽지에 싼 가격으로 유통되고 있던 <솔> 담배였다. 태한의 옆에 지게를 내려놓은 한영은 허공 깊은 곳을 가로 긋는 강을 바라보았다. 헤아릴 수 없는 낭떠러지와 경사진 언덕 같았던 수많은 순간 앞에서 힘주었던 주먹을 풀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행히 유년의 강은 여기까지 흘러와 16살이 되었다. 그러나 한영은 이제 곧 아버지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을 뿐, 태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이후 더는 유년의 강이라 부를 수 없어 전보다 더 험난한 굴곡을 꺾어야 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또래보다 현저히 작은 키, 마른 멸치처럼 빼빼한 몸,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나무지게를 짊어진 한영이 산에서 내려오는 일이 힘겨운 것은 당연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강이 보이는 산 중턱의 뒤편, 그곳에는 약 오십 미터 정도 되는 좁은 산길과 그 옆으로 깊게 파진 경사가 있었다. 한영은 조금 전 그곳을 돌아 나올 때도 2년 전 처음 했던 생각을 했다. 아니, 능동적으로 생각했다기보다는 겨울 산의 시린 냉기가 한영의 귓불에 쌓이듯 날 뾰족이 선 그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은 땅속 깊이 뚫고 내려간 뿌리처럼 한영의 영혼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왔다. 급경사 아래의 소나무 숲, 그곳엔 마치 거대한 야수의 아가리 속, 뾰족이 박혀있는 이빨처럼 부러진 가지 끝이 촘촘히 들어차 있었다. 한영은 그곳을 바라보며 지게를 진 아버지가 그곳으로 굴러 떨어지는 상상을 했다.


"아니야, 내가 과연 실행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과연 나를 용서하실까? 아냐, 아버지를 진작 데려가지 않은 하나님이 잘못된 거야. 맞아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몰라.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안 들어줄 리 없잖아."


한영은 가슴을 뚫고 나올 듯 크게 요동치는 심장을 아버지에게 들킬까 봐 겁이 났다. 담배를 다 피운 태한이 다시 지게를 짊어지자 눈치를 보고 있던 한영도 나무지게를 짊어졌다. 무르팍이 얼얼했지만, 그 고통은 끼니때마다 아버지를 마주해야 하는 고통에는 비기지 못했다. 산기슭에 매복 중이던 바람이 결빙의 창을 들고 몰려와 허공을 난도질했다. 그러자 폐허로 변한 잿빛 나날이 잡다한 침전물과 함께 한영의 기억 위로 떠올랐다. 온갖 것들이 한대 어우러져 세월이란 비커 안에 용해되었으나 끝끝내 용해될 수 없는 기억들이, 어느새 한영의 가슴을 흐리기 시작했다. 허공 위에도 결빙된 경사가 있었던 것일까. 행여 미끄러질까, 천천히 내려온 나뭇잎 하나가 사뿐히 바닥에 닿았다.



“다롱아 너 스트레스가 좀 있구나.”


“헛 내가 오늘 멀 잘못 먹었나 왜 자꾸 이러지.”


“허허 녀석 좀 보게 아저씨가 말하는데 자꾸 딴청을.”


“방금 소나무 아저씨가 말한 거예요?”


“오냐 녀석아.”


“와우 아롱아 너도 들리냐 소나무 아저씨가 말을 한다.”


“아니 난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아우 답답해. 왜 안 들린다는 거야! 난 잘만 들리는데.”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다롱 오빠. 아빠가 하지 말라는 것도 막 하고 먹성은 또 얼마나 심한지 드디어 오빠가 미친 걸까요?


“아롱아 진짜 안 들려?”


“잘 모르겠지만 뭔가 들리는 것도 같아.”


저는 그냥 다롱 오빠가 답답해 죽을까 봐 들린다고 해 주었어요. 아는 것도 모른 척해주는 여자와 다르게 남자들은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려고 하잖아요.


“와 아저씨는 안 심심해요?”


“너희 같은 녀석들이 가끔 와서 이렇게 오줌을 갈기며 대화를 걸어오니 살만하단다. 가끔 바람도 저 건너의 소식을 전해주고.”


“바람이 무얼 전해 주는데요?”


“음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의 여러 가지 소식들.”


“하긴 저도 콧등에 와닿는 바람에게서 무언가를 느끼긴 해요.”


“녀석 보통 경지가 아니구나.”


“처음엔 바람 온도만 감지했는데 어느 순간 그 온도 속에 느껴지는 느낌을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오호 녀석 대단한데.”


“아저씨는 여기서 얼마나 사셨어요?”


“나 오래됐지. 한 300년 되었나.”


“오 그럼 우리 아빠는 더 사는 가요?”


“아니지 너희 아빠는 100년도 못 살지.”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가만히 보면 인간들이 나무도 지배하는데요.”


“그게 웃기지 참 가소로운 일이지. 나보다 오래 못 사는 존재들이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우쭐대니 말이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네요.”


“저 인간들은 어리석기도 그지없단다. 100년도 안 되는 그 찰나의 순간들에 집착하며 아파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오만하고.”


“와 그럼 아저씨가 만물의 영장인가요?”


“아니 이 세상은 저 위에 계신 분의 작품일 뿐이지. 그려 놓고 어디 구석에 버려둔 그림 한 장 같은 것. 물감이 흐려지는지도 젖어드는지도 모른 채 다른 그림을 그리느라 바쁘신 건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언젠간 너도 알게 될 거다. 너의 싹을 보니 깨닫게 될 듯하구나.”


“그런데 아저씨 제 스트레스를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내 밑동에 싼 오줌에서 느꼈지.”


“너도 지금 네 털에 내려앉은 풀 이파리를 통해 느끼고 있잖아.”


“네 조금씩 느껴져요.”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서로에게 묻혀서 소통하고 있잖아. 너는 너의 오줌을, 우리 식물은 이파리를.”


“아빠는 왜 산책을 자주 안 시켜 줄까요?”


“글쎄다. 저 꼴을 보니 매일 술에 찌들어서 그런 거 아니냐?”


“아니 술도 술이지만 매일 뭔가를 끄적여요. 종이에 뭔가를 막 썼다가 그리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종이를 막 구겨 버리고 그래요.”


“거참 한심한 놈이로구나. 그 시간에 너희들이랑 산책이나 할 것이지. 역시 인간들이란.”


소나무 밑동에 한참을 비빈 오빠의 코는 다행히 닳아 없어지지 않았어요.


“녀석 왜 이리 많이 묻혔어.”


어느샌가 다가온 아빠가 우리 몸에 엉겨 붙은 이파리를 떼어 냈어요.


“야 너희들 꼴이 그게 뭐니? 아 덕지덕지한 털에 아휴 냄새까지 지독하네.”


저 앞에서 다가온 몰티즈 녀석이 시비를 걸기 시작했어요. 녀석은 비단결 같은 털을 가지고 있었어요. 녀석의 주인은 여자였어요. 그녀도 몰티즈 녀석처럼 곱고 긴 머릿결을 가지고 있었어요.


“저리 안 꺼져! 월! 월!”


오빠가 막 짖자 저도 따라 짖었어요.


“아이고 다롱아 아롱아. 그러면 못 써 이리 와.”


목줄을 세게 당기는 아빠가 몰티즈 녀석보다 미웠어요. 아니 조금 서운했어요.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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