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롱이 다롱이 만만세 23부

by 김준한

(39금)

아롱이 다롱이 만만세 23부


한영은 우두망찰 버스가 사라져 가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내리라고 강요하지 않은 버스에서 내렸으면서도, 마치 한바탕 실랑이 끝에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정신의 매무새 이곳저곳이 헝클어졌다. 역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캄캄한 은하계 속에서 그저 태양이 비추니까 반짝이는 별처럼 보였다. 삶의 중심부에서 추방당한 것처럼, 진정 살아있어 스스로 빛 발해야 하는 고통을 느껴야 하는 건 혼자뿐인 것 같았다. 버스에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 저들은 지금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처음부터 반드시 닿아야 할 목적지는 없었는지 모른다. 삶이 머무는 곳은 언제나 긴 노선 위의 버스가 잠시 정거하는 경유지에 불과했으므로, 그곳에서 한영은 늘 짧은 세월 함께 덜컹거리며 왔던 사람들 떠나보내고 다시 익숙해져야 할 낯선 사람들을 맞이하곤 했다. 여독을 지우기 위해 한영은 우두커니 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한 모금 삼킨 커피가 멱살을 잡듯 목구멍을 누르고 삼키지 못한 씁쓸함이 입안을 맴돌았다. 한 번도 엔진 소리 멈추지 않았던 세월의 바퀴, 그 닳고 닳은 바퀴가 점점 곤해지는 청춘을 데리고 경유했던 수많은 정거장이 별빛처럼 번지고 있었다. 벌써 역 정문에 걸린 대형 시계의 시침은 한영이 서 있는 동안 한 바퀴를 다 돌았다. 하지만 한영은 그 시간이 수십 년, 수백 년 아니 세월로 비유할 수 없는 영원한 세계 속에 서 있는 듯했다. 천천히 나아가는 그의 걸음은 마치 발 닿을 수 없는 허공 위를 너울거리며 떨어지는 잎 새처럼 느리고 불안했다. 잎 새가 닿을 곳은 땅이 아니라, 바스라기는 절규로 으스러져야 할 바닥인 것처럼, 하지만 한영에게 그것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허공 속을 허우적이는 고통보다 차라리 바닥이라도 닿아 막막함이라도 지우고 싶었다. 막 도착한 기차의 육중한 무게가 동공을 눌렀는지 한영은 휘청거렸다. 어디서부터 끊겼는지 알 수 없는 세월의 단면, 그 어디선가 툭 끊겨 버린, 그 끝은 레일의 절단면처럼 구부러지고 날카로웠다.


“손님, 뒤에 사람들이 기다리잖아요. 표를 끊으실 건가요?”


자판 위의 분주하던 손이 멈춘 여직원의 미간이 좁아졌다.


“죄송합니다.”


한영은 더듬거리는 손으로 겨우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홈 속으로 내밀었다.


“손님?”

“아! 네.”

“어디로 가실 건데요?”


한영이 멍하게 서 있자 여직원은 이마 위의 골을 더욱 깊이 팠다.


“손님, 표 안 사실 거면 옆으로 비켜 주세요.”


한영은 차창 너머로 지나는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슬픔도, 분노도,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차에서 내리자 어둠 스민 찬바람의 무게가 느껴졌다. 한영은 그 어둠의 무게를 털어내느라 잠깐 흔들렸다. 몸을 틀어 왼쪽 골목길로 접어들자 마치 검은손이 골목 귀퉁이를 비틀어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줄줄이 늘어선 유리 벽 조명등이 켜지자, 골목은 낯선 도시에 버려진 한영처럼 초라한 자태로 은밀한 곳에 숨긴 치부를 드러냈다. 유리 벽에 드러난 여자들은 고급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 같았다.


“오빠! 거기 멋있게 걷는 오빠! 왜 그리 헤매고 다녀?”


낯선 곳의 이질감 때문에 한영은 똑바로 서 있을 수 없었다.


“여기 처음이야? 오빠?”


수많은 사연을 역내에 풀어놓고 기차가 떠났지만, 또다시 꼬리를 물고 진입한 기차 소리가 골목에 부딪혔다.


“오빠! 그렇게 돌아다녀 봤자, 그게 그거야. 뭘 그리 꾸물대는 거지? 서비스만 잘해주면 되는 거 아니야?”


은밀한 곳이 보일 듯한 짧은 원피스를 입고 유리문 뒤에 서 있는 여자들의 입에도 걸친 것이라고는 달랑 팬티 한 장뿐인 것 같았다. 한영은 육체도 정신도 훤히 드러내 놓은 여자들을 보기가 민망했다. 내일에 대한 희망도 고개를 숙였다. 가증스러운 욕정만 눈치도 없이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저 오빠 아직도 저러고 있네.”


골목을 배회하던 한영은 돌고 돌아 다시 원점에 서 있었다.


“오빠! 그냥 이리 들어와요. 제가 잘해 드릴게요.”


그녀는 남자라면 누구나 탐낼 몸매였다. 한영이 벌써 어둠 속을 한 시간이나 방황한 것은 숙기가 없어서도 여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다달이 백만 원, 20개월 이상을 갚아야 한다는 것, 아롱이 다롱이와의 행복한 시간을 보장받은 것은 감사했지만, 사정하지 못한 정액이 몸 안에 오랫동안 고인 것처럼 답답했다. 가슴속에 고인 답답함이 어두운 골목을 한참이나 돌았다.


“오빠 누구 찾는 사람 있는 거야?”

“글쎄, 내가 그렇게 보여?”


한영은 비스듬한 자세로 물었다.


“너처럼 쭉쭉 빵빵 샤방샤방 말고 약간 통통하다 싶은 정도에 키는 내 머리 하나만큼 작고,”

“어이구 대단한 인물 납셨네!. 여기서 이상형을 구하는 거야? 여기에 그런 여자 있으면?”

“아니 그냥 혹시나 해서.”

“뭐 빚이라도 청산해 주고 데리고 살 거야?”


그녀가 타박하자 한영은 후끈거렸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한 게 확실했다. 남자 하나가 들어오지 않고 애인 구함광고 같은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짜증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오빠 꼭 아까 오빠가 말한 그런 여자랑 해야겠어?”

“응,”

“오빠 애인 있어?”


한영은 순간 숨이 막힌듯했다.


“애인이라 꼭 죽고 못 사는 존재가 사람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럼 사랑하는 생명이 있지. 나도.”

“그게 무슨 말이야?”

“안 되겠다. 술 한 잔 더 마시고 올게.”

“어머나! 여기 왔으면 달콤한 여자 입술을 빨아야지, 어디서 쓰디쓴 술을 빨러 간데?”


한영이 어둠 쌓인 골목을 걸어 나갈 때마다 발밑에 바스러진 어둠이 가로등 아래로 흩어져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불면의 밤 오지 않는 내일에 대한 근심 속을 서성인 사유의 발자국들, 결코 가벼운 외로움이나 그리움이 아니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은 마치 사막 한가운데 던져진 뜨거움이었다. 누구도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한영의 가슴은 타들어 갔다. 목사님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온 지 벌써 20년이 넘은 세월이었다. 신춘문예를 낙방하고 얻은 아롱이 다롱이, 한영은 그해 허울뿐인 신춘문예보다 더 큰 복을 얻은 것을 깨우쳤다. 그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아직도 허상을 잡고 몸부림치고 있을까? 부질없는 명예욕 공명심들. 정작 소중한 것은 소홀히 하고 마음 두지 않고 떠나보낸 후에야 후회를 하는 사람들. 그들이 진정 본질을 보는 심미안이 트였다면 인생은 결코 절망도 후회도 없다는 걸. 그저 흘러가는 세월에 몸을 맡기고 한 번 가면 그뿐이란 걸. 아름다움과 추함이 다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란 걸. 하지만 지금 한영에겐 아롱이 다롱이가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했다.


“어라 너 아직도 손님 못 받은 거야?”

“그래 오빠야. 나 불쌍하지 않아? 이 몸매에 이 이쁜 얼굴에.”


그녀는 다시 나타난 한영을 보자 헤어졌던 친구를 만난 듯 전에 없던 미소를 지었다. 한영은 그녀가 어둠 속에 갑자기 나타난 불빛처럼 느껴졌다. 담벼락 귀퉁이엔 빛도 사람들의 발자국도 기차 소리도 드나들지 않았다. 슬픔처럼 눅눅한 공기를 먹고 자란 이끼와 이따금 벽에 부딪혀 금이 쫙쫙 갈라진 바람만 내려앉았다. 보도블록 하나의 경계로 이곳은 어둠, 저곳은 밝음, 여기서 몇 발짝만 걸음을 옮기면 그곳엔 일상의 사람들이 살아갔다. 보편적인 삶은 그곳에 있고 한영이 선 곳엔 낯선 삶이 있었다. 하지만 한영은 이제부터는 자신을 세상과 동떨어진 이방인이라고 단정 짓지 않기로 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어차피 하나의 경계로 이편과 저편을 살아갈 것이다. 나무의 화려한 줄기와 꽃이 위에서 피고 지고, 나무의 뿌리가 아래에서 팽창하며 썩어가듯.


“서비스 잘해 줄 거지?”

“이제야 발품 판 것이 억울한가 보지?”

“미안 그래도, 여기서 네가 제일 마음에 들어. 나랑 말도 섞었잖아. 그러니 몸도 섞어보자. 마음까지 섞어 주면 더 좋고.”

“어머머 이 오빠 뭐라니!”

“농담이야.”

“오빠 저기 끝 보이지? 화장실 옆에.”


그녀가 슬리퍼를 건네며 문을 열자 좁은 복도가 나타났다. 좁은 복도를 중심으로 양옆에 방문들이 있었다. 한영이 복도를 걸으며 나아가자 낯선 향수가 코를 자극했다. 천장 위엔 전구가 꽂혀 있지 않은 소켓이 더 많았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곧바로 굽 높은 구두를 벗고 한영을 따라 들어왔다. 좁은 방엔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조그만 탁상 위엔 컴퓨터 모니터와 분홍색 갓을 씌운 스탠드가 있었다.


“그럼 오빠 준비할 동안 옷 벗고 있어.”


분홍빛이 드리운 방안은 어둠과 밝음의 중간 톤이었다. 곧이어 그녀는 물이든 조그만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오빠, 뭐해요?”


그녀가 대야를 놓고 한영을 바라보았다.


“연애 안 할 거야? 오빠 처음이구나.”


그녀가 두 손으로 발기한 한영의 것을 물로 닦아내자 한영은 마치 온탕에 온몸을 담글 때처럼 짜릿했다. 곧이어 그녀의 혀가 한영의 앙상한 가슴골을 타고 내려왔다. 입은 말하지 않아도 숨결과 숨결이 나누는 육체의 대화, 한영은 밑에 누워 여자가 주저리는 언어를 경청하는 쪽이었다. 그녀의 독백에 한 가닥 신음으로 짧게 대답한 한영의 손이 그녀의 깊은 곳을 묻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은밀한 곳을 더듬는 한영의 손을 뿌리쳤다. 곧이어 그녀는 한영의 것을 입에 넣고 마치 아이스크림 빨듯 흡입했다. 한영은 그녀의 뒤척임에 익숙해졌다. 바다 한가운데 배를 띄우듯 그녀의 물결 따라 나아가는 한영, 멀리 순풍이 불어오는 듯했다. 그녀가 허락하자 한영은 단단한 노를 그녀 안에 담그고 천천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노를 저을 때마다 그녀는 출렁이는 신음을 튀어 올렸다. 그녀가 밀어 올리는 큰 파도 때문에 이따금 온몸이 요동치기도 했다. 순간 한영은 그녀의 깊은 바닥에 닿고 싶었다. 그 바닥에 닿으면 더 이상 망망한 세월 위에서 흔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 바닥에 있는 절망은 손에 잡히지 않는 캄캄한 색채가 아니라, 삶을 옥죄는 밀도란 걸. 그녀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노가 움직이는 힘만큼 출렁이며 살결을 뜯었다. 수많은 시절, 역류할 수 없는 물고기들의 이별이 이 바다를 이토록 짜게 만들었을 것이다. 한영은 그녀의 바닷속 해초처럼 엉킨 사연과 한 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는 보여 줄 수 없다면 한영을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 떠밀었다.


"왜 그만두는 거야?"

"미안, 안 될 것 같아."


한영은 그녀의 바다에서 노를 건져 올렸다.


“힘들지? 이렇게 힘든 걸 남자들은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몰라.”

“넌 오늘 배불리 먹었다고 내일 안 먹니? 평생 되풀이해야 하는 형벌이야. 모든 것이 그래.”


밖으로 나온 한영은 늦으면 언제나 이불을 뜯고 벽을 뜯는 녀석들이 걱정되었다. 애견마트에서 간식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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