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롱이 다롱이 만만세 22부
굵어진 빗줄기가 북적이는 무게를 물리치기 시작했다. 우산 없는 인파가 먼저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어둠이 비를 돕기 위해 시장통에 집결하자 수적 열세에 밀린 인파는 전의를 상실한 채 집으로 퇴각했다. 평소 같으면 걸어서 5분인 투다리를 한영은 더딘 걸음으로 향했다. 움푹 파인 곳에 고인 빗물, 한영이 흘려보내지 못한 기억처럼 출렁였다.
“동규야. 일찍 와 있었네.”
뭉툭해진 모서리를 다시 한번 갈아 날을 세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한영의 목소리는 물에 젖어 허물어진 티슈 같았다.
“만날 생각 없다며? 아니 신고하라며 그래서 신고했다. 그런데 왜 다시 마음이 바뀐 거지?”
동규의 토막 난 말끝이 날카로웠다. 오늘은 절대 안 봤으면 했던 아영이가 불행히도 가계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마치 한영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비추는 빛 같았다. 한영은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지만 청결한 가계 안에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미안하다 동규야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니?”
“와 그렇게 당당할 때는 언제고 불쌍한 척 비굴해졌네.”
한영의 떨군 고개를 누른 동규의 고개가 더욱 빳빳했다.
“그냥 가서 한 달만 살아.”
“동규야 진짜 미안하다.”
“와 한영이 개 키우더니 완전 개 됐네. 하기야 개가 사람이 될 수는 없지”
동규는 500잔을 들어 맥주를 삼켰다. 한영은 뱉지 못한 말과 함께 침을 삼켰다.
“내가 좀 알거든. 개새끼들 간식 달라고 주인 애처롭게 바라보는 눈빛, 지금 네 눈빛이 딱 그렇네.”
한영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근데 그거 다 마음에 없는 본능이거든. 개새끼에게 주인은 그저 밥 주는 사람이거든. 개새끼는 그 밥 얻어먹으려고 꼬리 치는 건데. 사람들은 진짜 개가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안다니깐.”
“동규야 제발 부탁이다. 용서해 주라.”
“개새끼 위선 떨지 마라. 아 맞다! 나도 간식 줘야지. 잔 들어. 알코올 중독자 새끼 자, 내가 주는 간식이다. 처마셔라.”
동규는 마시던 맥주를 빈 잔에 조금 따랐다.
“왜 모자라나? 간식 더 달라는 눈빛이네. 하하. 아영 씨 여기 내 개새끼가 간식이 모자란 지 계속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있네요. 여기 500 두 잔 주세요.”
“동규야. 우선 이걸로 약값 해라.”
“요새 돈 좀 버는가 보네. 얼만데?”
“50”
“지금 장난하나? 나 수술비만 이천만 원 들 거야. 좋다. 깔끔하게 2500 어때?”
“동규야 그 큰돈을 내가 어떻게 마련하겠니. 시간을 주라.”
“그럼 가서 한 달만 살라니깐! 좋잖아! 이천 벌려면 몇 달인데 한 달만 사는 게 낫지 않아?”
“그럼 내 아롱이 다롱이는?”
“굶어 죽겠지. 내가 원하는 게 그거야. 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는 거.”
“동규야 진짜 미안하다. 내가 다달이 치료비 값을 게.”
불 꺼진 자취방에 들어오면 방안 가득 쌓인 어둠은 마치 밀도를 가진 듯 한영을 옭아맸다. 잠을 자기 위해 누우면 가 닿지 못한 내일에 대한 간절함이 어둠과 뒤섞여 한영의 기억 속을 어지럽혔다. 불면의 나날 한영은 상상으로 사랑을 했다. 우주에 던져진 듯 닿을 수 없는 시간 속에 꿈을 그렸다. 술이 없으면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어느 날 나타난 아롱이 다롱이는 그런 한영에게 돌아갈 집이었고 우주를 배회하던 한영의 발이 척추에 힘주며 설 수 있는 땅이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너 간식 떨어졌구나. 자 이거 단번에 마셔. 그럼 생각해 볼게.”
한영은 동규가 다시 시킨 500 한 잔을 들이켰다.
“어라 흘렸네. 이 아까운 술을 이게 다 돈이다. 우리가 저 바닥 일하면서 개처럼 번 돈이란 말이다. 핥아! 죽고 못 사는 네 아롱이다롱이처럼”
간식을 사 들고 집에 도착하면 녀석들은 캄캄한 적막을 꼬리로 물리쳐 주었다. 녀석들이 품에 안겨 볼을 핥을 때마다 한영은 눈물을 흘렸다. 슬픔과는 온도가 다른 눈물이었다. 그러나 행복이 밝아질수록 빛의 반대편에 드리운 두려움은 더욱 짙어졌다.
“동규야 이렇게 빌게. 한 번만 용서해 주라.”
“위선자 새끼! 개새끼 때문에 돈을 갚는다고? 뻔한 네 속셈 모를 줄 알고? 합의 봐주면 모른 체하고 도망가겠지. 웃기고 있네. 개새끼한테 죽고 못 산다고?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 있어!”
“동규야 나는 아롱이 다롱이 때문에 산다.”
“그래 동규야 내가 봐도 한영이는 아롱이 다롱이 없으면 못살지 싶더라 이제 그만하고 좋게 합의 봐주라. 그놈이 어딜 도망가겠냐. 외롭다고 매일 여기 오는 놈인데.”
“이 새끼 위선에 넘어가지 마세요.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 있어요? 다들 제 살기 위해 개를 버리는데 개를 위해 자기를 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거 다 수작이라니까요.”
지켜보던 미화가 한마디 거들었으나 동규는 완강했다.
“맞아요. 삼촌 우리 엄마 말이 맞아요. 접대 한영이 삼촌 다롱이 없어졌다고 막 울더라니까요. 내가 증인이에요. 저도 놀랐어요. 세상에 이런 사람 처음 봤거든요.”
아영의 말은 마치 엄지손가락이 되어 벌레가 된 한영을 짓이기는 듯했다. 한영은 아영이 앞에 발가벗겨진 듯. 영혼의 척추가 부러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어디에도 시선 둘 곳 없는 한영은 동규가 허락지 않는 맥주를 단숨에 마셨다.
“동규야 제발 용서해 주라. 내가 아롱이 다롱이 두고 어딜 가겠니? 네 말대로 녀석들 아니면 한 달 살기 얼마나 쉽겠니? 녀석들이 내 목숨인걸. 동규야 이렇게 내가 무릎 꿇고 빌게.”
한영은 동규 앞에 꿇은 무릎의 욱신거림보다 등 뒤에 꽂히는 아영의 눈빛을 더욱 견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