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롱이 다롱이 만만세 20부

by 김준한

아롱이 다롱이 만만세 20부


순간 혈관 어딘가 막혀 질식할 것 같은 현기증이 밀려왔다. 함께 달리다 어느새 나들목을 빠져나가고 보이지 않는 자동차처럼 돌아서던 시절 인연들에게 끝끝내 털어놓지 못한 말들, 원고지에 그려지지 않는 문장이 마음속에 맴돌 때와 같은 느낌, 그것은 한영의 20대 때 시작된 열병 앓이와 같았다. 닿을 수 없는 수평선을 저 멀리 두고 한여름 청춘의 뙤약볕 아래 노 젓던 고달픔, 물결 위에 남긴 하루의 흔적은 금방 어제의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결실 없는 문학이 그랬고 여인에 대한 그리움이 그랬다.


“그럼 그렇지 이놈의 서울에 왜 이리 차가 많은 거야!”


뜨거운 것이 심중을 막아서 뚫어내지 않으면 타 죽을 것 같은 문장처럼 도로 위에 쉼표를 찍은 자동차들은 한 줄도 이어나가지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군. 어휴”


일이 끝나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투다리로 달려갔건만 서울에서 3시에 출발한 몰탈 트럭은 5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서울 요금소를 빠져나왔다.


“한영아 오늘 올 거야?”


“네 가야지요.”


“그럼 오늘은 일찍 좀 와. 늘 바쁠 때 오지 말고, 그래야 이야기도 나누지. 한가할 때 일찍 오란 말이야.”


“네 누님 알겠어요.”


한 시간 전 서울 시내에서 미화와 통화를 한 걸 이제야 기억해 낸 한영은 뒤늦은 설렘에 부풀었다.


“무슨 일이지? 설마 아영이를 정식으로 소개라도 해주려나.”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쓴웃음으로 지웠다. 별 볼 일 없는 자신에게 누가 자기 살 같은 딸을 소개한단 말인가. 미화가 대놓고 하는 영업이라고 해도 상관없는 한영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돈 내고 술을 먹으나 넋두리 들어주는 미화의 매상을 올려주나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외로운 놈은 돈으로 친구를 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피붙이 하나 없는 한영에게 투다리 집주인 미화는 자신의 푸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혼자 술을 먹는 것보다 몇만 원의 대가를 더 내고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건 한영에게 수지맞는 장사였다.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예쁜 아영의 엄마 아니었던가. 50 중반의 누님이었지만 그녀의 엄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화 곁에서 술을 마시면 마치 아영의 숨결과 아영의 뜨거운 피를 느끼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롱아 미안해. 이따가 아롱이 좋아하는 한치랑 울 다롱이 좋아하는 칠면조 뼈다귀 가져올게. 싸우지 말고 놀고 있어.”


한영이 막 들어왔을 때도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듯 울며 꼬리 치던 녀석들이었다. 금방 욕실에서 나왔건만 다시 꼬리 치며 안기려는 녀석들을 보며 한영은 세상 어느 연인이 이럴까 싶었다.


“어라 오늘 운이 좋은 날이네요. 오래간만에 아영 씨를 보다니.”


한영이 옥탑방에서 투다리까지 빠른 걸음으로 온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네 오래간만에 엄마 도우러 나왔어요.”


오랜만에 만난 아영이를 앞에 앉혀 놓고 그녀가 입고 온 하얀 원피스 위에 자신의 마음을 새기고 싶었지만 몇 테이블의 서빙을 하느라 분주한 그녀를 부를 명분은 없었다.


“오라 오늘 아영 씨 왔다고 나 보고 일찍 오라 했구나.”


“호호 설마요. 우리 엄마가?”


“네 그렇다니깐요. 하하”


“엄마 나 팔았구나!”


주방으로 들어가는 아영은 한영을 보지 않고 등으로 말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인들 대수일까? 점당 몇만 원 하는 그리 비싼 판 아니면 마음껏 잃어 주어도 좋다 싶은 한영이었다.


“화장실가게 키 좀 주세요.”


아영이 키를 들고 내미는 손을 잡고 싶었지만, 수평선에 걸린 별빛 같은 것이었다.


“만수 형도 오셨네요? 동규! 언제 왔냐 와 오랜만이네. 요즘 어떻게 지내냐?”


몇 잔의 술을 마시고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비었던 테이블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네 그냥 형은 몰탈 일 한다면서요?”


“응, 그런데 넌 만수 형이랑 어울리는 거 보니 아직도 고정 직장 못 잡고 용역 다니냐?”


알코올 끼가 섞여 다소 구부러진 한영의 음성이었으나 동규를 무시하고자 하는 감정은 일도 없었다.


“형 방금 뭐라 그랬어요?”


동규가 씹던 오징어 다리가 딱딱해진 것인지 그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뭐라니?”


“방금 그 말 의도가 뭐예요?”


“인마 무슨 의도?”


“잠깐 나와봐요.”



순간 한영의 마음속엔 <아영에게 향한 기도>가 끝나지 않았는데 이선희가 부르던 <소녀의 기도>가 끝나고 다음 곡을 위한 정적이 몇 초간 이어졌다. 당혹해진 건 한영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보다 어린 후배가 인상을 구기며 밖으로 나오라는 말을 그것도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들었을 때 기분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영이 입은 하얀 원피스 위에 그녀를 향한 마음을 끄적이고 싶었던 한영이었지만 분위기가 허락지 않았다.


“그래 나왔다. 어찌할 건데?”


“아니 형이 그리 잘났나?”


“너 지금 뭐라고 하는 거니?”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지금 개 무시하는 거예요?”


“야 인마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노?”


“위선자 혼자 좋은 말은 다 하고 다니더구먼”


“헉 이 새끼 봐라. 지금 너 단단히 오해하는 거야.”


“오해는 무슨 개뿔 같은 소리 역겹네! 진짜 여기 단골이라고 소문 다 났어. 딸내미 어찌해보려고 그런 사람이 참나!”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냐?”


“개도 키운다면서? 별 쇼는 다 하네! 병신 쪼다 같은 새끼! 왜 개 키운다고 하면 여자들이 좋아한다 드나? 제 밥도 못 먹어서 겨울에 소장한테 돈까지 빌렸다면서?”


“하 이 새끼 봐라.”


한영의 가슴 깊숙한 곳에 흐르던 마그마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한영은 아롱이 다롱이를 생각하며 분노의 입구를 막았다.


“넌 어디서 그런 소릴 들었노?”


“시판 명신 새끼 너 양아치라고 용역에 소문 다 났어.”


분출하지 않으면 마그마가 한영의 핏줄을 녹여서 끊어 놓을 것 같았다.


“너 죽고 싶나?”


“그래 한판 하자. 너 같은 새끼 한 사발도 안 돼!”


위기의식이 없었다면 거짓이었다. 동규는 분명 한영보다 덩치도 컸다. 힘도 좋을 게 뻔했다. 더군다나 저 앞에는 아영이가 있지 않은가. 한영은 어떻게든 자신과 어린 후배와 싸우는 추태를 보이기 싫었다. 하지만 형답게 아우를 다스리는 모습을 보이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 새끼가!”


“찰싹!”


결국, 활화산의 분화구가 터져 한영의 마그마가 솟구치고 말았다. 모서리의 어둠 힘겹게 깜박이고 있던 가로등이 그 순간을 명분 삼아 점멸했다.


“악! 쳤나 지금!”


“그래 쳤다. 자식아!”


그래 놓고 한영도 빛을 잃고 운명한 백열등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갑자기 술기운이 오른 듯 얼얼해진 동규는 자신의 뺨을 쓰다듬을 뿐 다행히 한영에게 보복하지 않았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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