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선물

by 김준한

두 생명의 숨결을 느끼며 잠이 들자 어디선가 밀려온 온기가 텅 빈 꿈 속에 똬리 튼 차가움을 물리 쳤다. 내가 먼저 원했던 건 아니었다. 홀로 잠에 익숙해진 몸, 두 생명을 옆에 끼고 자는 것은 내 몸 이리저리 뒤척이지 못해 너무나 불편한 일이었다. 박스 보다 몇 배다 넓은 욕실에 포근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건만 녀석들은 문을 긁으며 계속해서 낑낑거렸다. 몇 발치에 내가 누워 있건만 그동안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서 본 적 없는 절박함을 보여주었다. 그 절박함에 익숙해진 건 나였을 뿐. 정든이들과의 이별 후에 눈물 흘린 건 그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다. 잡을 수없는 시절과의 이별에 절규했던 지난날처럼 내 영혼이 더 일찍 깨여 9살 그날로 돌아간다면 나도 떠나는 엄마를 잡고 절규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그녀를 만난다면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너 아니면 안 된다고 나를 제발 주워달라고 이 차가운 세월의 박스에서 들어 안아달라고, 너와 나 사이에 놓인 커다란 문을 열어 나를 허락해 달라고 울부짖을 것이다.

새벽에 눈을 뜨자 먼저 깨인 녀석들이 오랜 이별 끝에 다시 만난 듯 꼬리 치며 얼굴을 핥았다. 언제나 아침에 깨이는 일은 또다시 낯선 적막 속에 홀로 던져지는 일이었는데, 그동안 수평선 너머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허상을 희망 삼아 버틴 삶이었는데, 녀석들은 내게 또렷한 삶의 이유가 되었다.


강아지들의 평균 수명이 15년이란 걸 알았을 때 나는 또 다른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다. 다시는 이별 같은 것을 맛보기 싫었다. 벌에 쏘여 본 자는 벌만 봐도 그 따가운 고통을 느낀다. 홀로 외로움에 허덕이던 나는 아롱이다롱이의 온기를 목숨처럼 여기며 행복했지만 애기들이 떠난 후 전 보다 짙게 다가올 적막에 대한 두려움이 빛과 그림자처럼 공존했다. 빛이 밝을수록 짙어지는 그림자처럼 너무 행복해서 찰나뿐인 삶과 유한한 목숨에 절망했다.


삶이란 늘 운 좋게 오늘 배부르게 먹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런 것은 찰나였다. 다음 날 또다시 찾아오는 허기처럼 매일 견뎌야 하는 존재의 고독과 외로움, 매일 낯선 하루를 견뎌야 하는 삶은 끝없는 숙제 같았다. 오늘 살아남았다고 웃을 일이 아니었다.


10년 넘는 세월 애기들과 함께 호흡하며 처음에 나는 이별과 죽음을 부정하며 싸우다가 끝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 순간부터는 하나하나 내려놓기 시작했다. 아니 어차피 삶은 부질없는 거였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는 것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음을 향해 가는 동반자로 여긴다면, 우리는 덜 외롭고 덜 고독할 것이다. 내가 애기들과 모든 것을 함께 하기로 마음먹자 나는 그 말 못 하는 애기들과 있는 것이 덜 외롭고 덜 고독해졌다. 죽음도 함께 할 수 있는 사랑이라면 무엇이 두려울까? 만남의 결과는 언제나 이별이었고 생의 결과는 죽음이란 그 명확한 현실 앞에 그동안 내 안에 꿈틀거리던 욕망과 집착과 다른 모든 것들이 망상이고 허상이란 걸 깨달았다.


욕망덩어리였던 전에는 죽음이란 현실을 망각하고 그것을 되려 허상으로 여긴 채 부질없는 것들을 집착하며 잡을 수 없는 것들을 잡았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그래서 가지지 못하면 가지고 싶어 안달했고 보고 싶은데 보지 못하면 가슴 앓았고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면 가슴 타들어갔다. 그러나 내가 정한 삶을 살다가 내가 죽음을 선택하자 마음먹으니 그때 속이 뻥 뚫린 듯 후련해졌다. 더 이상 나는 욕망의 노예로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 어떤 차가운 욕망의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거나 부러지지 않는 나무기둥처럼.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생존하는 것이었다. 만약 모든 욕망을 버린다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니 모두가 자살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병들고 초라하고 주위에 아무런 도움도 못되고 피해를 주면서 왜 꾸역꾸역 살아야 하나? 그처럼 자존감 상하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어쩌면 자살 <안락사>은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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