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풀코스 도전
애틀랜타 경기장의 출발점에 섰을 때, 나는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출발점에 섰을 때는 이미 승부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마라톤이라는 스포츠다. 어떤 식으로 출발점까지 왔는지, 그것이 전부다. 나머지는 42.195킬로미터를 달리며 실제로 확인할 뿐이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다리와 근육과 피 속에 흐르는 조용한 확신 같은 것을 느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시드니>(2015)
2025년 3월 16일 오전 7시. 영상 3도. 광화문광장. 서울마라톤이 열리는 장소에 나와있다. 새벽에 비가 세차게 내렸다가 그쳤고 지금은 부슬비가 내리고 있다. 언제라도 굵은 빗방울이 다시 쏟아질 듯 하늘이 온통 잿빛이다. 가만히 있으면 추위에 몸이 떨린다. 어젯밤까지도 대회 복장을 고민했다. 상의는 싱글렛에 암슬리브 착용을 고려했지만 안전하게 체온 유지를 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얇은 긴 팔 상의 위에 분홍색 싱글렛을 겹쳐 입었다. 그리고 검은색 얇은 장갑도 끼고 비가 올 것을 대비해서 챙이 있는 하얀색 모자도 썼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못생김 방지를 위한 선글라스도 챙겼다. 렌즈가 커서 얼굴의 3분의 1 정도를 가려준다. 특히 눈가의 주름을 가려주어 5살은 어리게 보이는 효과를 발휘한다. 마라톤에서 중요한 요소다.
결과적으로 복장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서울 고층 빌딩 사이를 휘몰아치는 바람이 몹시 차가웠고,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한 비 때문에 싱글렛만 입었다면 저체온증으로 레이스를 중도에 포기했을지 모른다. 골인 지점에 들어올 때까지도 기온이 영상 5도에 불과한 추운 날씨였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더운 날 마라톤을 달리는 것보다는 낫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날씨였다.
오늘은 4개월 전 있었던 JTBC서울마라톤에 이어 두 번째 풀코스에 도전하는 날이다.
국내 3대 메이저 마라톤대회 중 하나인 서울마라톤.
서울의 주요 명소를 배경으로 달리는 서울마라톤 풀코스는 매년 3월 광화문광장에서 열린다. 올해로 95회째를 맞이하는 서울마라톤 겸 동아마라톤은 세계육상연맹(WA)이 인증한 국내 유일의 플래티넘 라벨 마라톤 대회이다. 2019년 보스턴 마라톤과 아테네 마라톤에 이어 마라톤으로는 세 번째로 세계육상문화유산(World Athletics Heritage)으로 지정되었다.(이번 대회에 참가하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이런 것도 있었구나)
1931년 일제강점기에 ‘제1회 마라손경주회’로 시작된 대회는 서울역에서 영등포역 구간을 왕복하는 23.2킬로미터의 단축 마라톤으로 출발했다. 1940년 일제의 탄압으로 동아일보가 정간되어 대회가 중단된 이후 한국전쟁의 암흑기를 거쳐 1953년 다시 부활하여 현재까지 그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도 1932, 33년 동아마라톤에서 입상한 경력이 있는 대한민국 대표 마라톤 대회이다.
나는 운 좋게도 이렇게 유서 깊은 대회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대회신청을 선착순으로 접수를 받았다. 다행히 손이 빨랐다.
광화문광장은 풀코스에 출전하려는 선수들과 대회 운영진, 도로 통제를 하기 위해 나온 경찰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보이는 엠뷸런스만 10대가 넘어 보인다. 주최 측에 따르면 이번 대회 참가자는 풀코스 2만 명, 10킬로미터 2만 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라고 한다. 지금 이곳 광화문광장에는 풀코스 출전 선수만 2만 명이 모인 것이다. 10킬로미터 코스는 잠실주경기장이 출발지이자 골인지점이다. 마라톤 말고 이렇게 많은 인원이 동시에 참여하는 스포츠가 있나 싶다.
세종문화회관 입구 계단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러닝크루가 모여 있다. 저마다 개성 있는 깃발을 들고 크루원들을 맞이하고 있다. 마치 전쟁을 앞둔 중세 유럽 영주들의 병사들이 모인 것 같다. 특히 20, 30대로 보이는 젊은 러너들이 많이 보인다. 기사에 따르면 풀코스 참가자 중 30대 비율이 36.6%로 가장 많았으며 여성 참가자도 18.4%라고 한다. 예전의 마라톤 이미지는 중년의 마른 아저씨들이 러닝셔츠를 입고 달리는 다소 비주류 취미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젊음의 스포츠로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다. 아무래도 지금의 마라톤 인기는 반짝하고 사라질 것 같지 않다. 마라톤 완주의 성취감을 맛본 사람은 쉽사리 그만두기가 힘들다. 많은 러너가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역동적이고 신나는 축제분위기가 더욱 젊은 러너들을 끌어당기는 듯하다. 나처럼 40대 중반의 러너도 이렇게 흥분되고 설레는데 20, 30대 러너들은 오죽하겠는가.
아직 출발 시각까지는 40분 정도 남았다. 추위도 피하고 생리현상 해결을 위해 광화문역 내 화장실로 갔다. ‘우아!’ 화장실 줄이 50미터는 넘어 보인다. 특히 남자 화장실 대기줄이 여자줄 보다 3배는 길다. 참으로 익숙지 않은 장면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길게 늘어선 여자 화장실 줄을 지켜보던 입장에서 정반대의 입장이 되었다. 참가비를 몇 천 원 더 내도 좋으니 화장실 좀 많이 만들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0분 정도를 기다려서 화장실을 해결하고 출발지점으로 향했다.
오늘은 D그룹에서 달린다. 그룹 배정은 마라톤 공식 기록에 따라 A조부터 G조까지 나뉜다. 나의 최고 기록은 하프코스 1시간 39분, 풀코스 4시간 6분이다. 그 기록에 맞게 D조에 편성됐다. 마치 신용등급에 맞게 대출한도를 정하는 은행처럼 주최측은 나를 D등급으로 분류한 것이다. 딱 중간이다. ‘대회가 끝나고 나면 가을에는 더 상위 조에 편성될 것이다. 분명히.’
지난 JTBC마라톤에서는 마지막 그룹인 F조 그것도 가장 맨 뒤에서 출발을 했다. 풀코스 기록이 없는 사람을 E, F그룹으로 배정했다. 4개월 사이에 많이 올라왔다. 따라서 초반 병목현상을 덜 겪게 될 것이고 그만큼 페이스 조절에도 유리할 것이다. 계획한 페이스로 꾸준히만 달리면 되는 것이다.
지난 대회가 설레고 떨렸다면, 오늘은 사뭇 진지하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지난 대회 이후 실패의 원인을 분석했다. 가장 큰 원인은 장거리 훈련 부족. 당시에 30킬로미터 한 번, 35킬로미터 한 번을 달려보고 대회에 임했다. 최장거리가 35킬로미터였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추운 겨울 30킬로미터 이상 6번을 달렸다. 그중에 두 번은 37킬로미터를 달렸다. 당시에 마지막까지도 아직 힘이 남아있었다. 추운 영하의 날씨에 장갑에 마스크를 끼고 핫팩을 손에 쥐고 달렸다. 무거운 겨울 러닝복을 입고도 장거리 훈련에 모두 성공했다. 오로지 혼자서 묵묵히 한강을 달렸다. 한강 반포공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한 방향으로 15킬로미터를 달린다. 그리고 돌아온다. 집에 돌아가려면 주차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실패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었다. 한 번도 걸어서 돌아오지 않았다. 걸으면 바로 감기에 걸리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단련했다. 미친 사람처럼 혼자 달렸다. 왜 그렇게 달리냐고 물으면 대답이 썩 명쾌하지 않다. 몇 가지가 머릿속에서 맴돌지만 대체로 ’그냥 해내고 싶다 ‘ 정도로 대답할 뿐이다. 언젠가 다른 멋진 대답에 이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저서에서 마라톤이라는 스포츠는 출발선에 서는 순간 이미 승부는 정해진다고 했다. 이제야 그 의미를 실감한다.
할.만.큼.했.다. 는 것이 내 결론이다. 최선을 다해 시험준비를 마치고 고사장에 차분히 앉아 있는 수험생처럼 담담하다. ‘이미 정해졌다.’
‘나는 오늘 걷지 않고 반드시 4시간 안에 완주한다.‘
배번호가 바람에 펄럭인다.
간다! 바람을 달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