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독서 노트, 윌리엄 셰익스피어
'최소 한 달에 한 권의 책 읽기.' 필자의 인생 목표 중 하나이다. 다행스럽게도 어느덧 일 년 가까이 목표를 잘 이어나가고 있다. 생각보다 달성하기 쉬운 목표는 아니었다. 평일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주말에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독서를 미루다 월말에 가까스로 목표를 달성한 달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 달에는 조금 쉬어가는 의미에서 분량이 짧은 책 중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이하,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선택했다. 이 책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원작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 '청소년을 위한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어 줄거리를 대강 알고 있기 때문에 쉬엄쉬엄 읽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중략) 단 한 자루 단검이면 자신을 청산할 수 있을진대. 누가 짐을 지고, 지겨운 한 세상을 투덜대며 땀 흘릴까? 국경에서 그 어떤 나그네도 못 돌아온 미지의 나라, 죽음 후의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의지력을 교란하고, 우리가 모르는 재난으로 날아가느니, 우리가 아는 재난을 견디게끔 만들지 않는다면?"
윌리엄 셰익스피어,「햄릿」, 최종철 역, 민음사, 2008, pg.94
"지금 하면 딱 맞겠다, 지금 기도중인데. 그래 지금 할 거야. 그럼 놈이 천당간다. 그래서 내가 복수한다. 그건 따져봐야지. 악당이 내 아버질 죽였는데 그 대가로 유일한 아들인 내가, 바로 그 악당놈을 천당으로 보낸다. (중략) 아서라 칼아, 더 끔찍한 상황을 만나자. 놈이 취해 잠자거나 광란하고 있을 때, 침대에서 상피붙어 쾌락을 즐길 때, 경기 도중 욕하거나 구원받을 기미가 전혀 없는 행동을 하고 있을 바로 그때, 다리를 걸자. 그래서 놈의 발꿈치는 하늘을 박차고, 영혼은 목적지 지옥만큼 시커멓고 저주받게."
「햄릿」, pg.125
햄릿은 삼촌 클로디어스에게 살해된 아버지의 복수를 두고 심각하게 고뇌한다. 특히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도 알려진 명대사로 시작하는 구절에서는 필자도 햄릿의 고뇌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었다. 심사숙고 끝에 햄릿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한 절호의 기회 앞에서 더욱 명분 있는 복수의 순간을 기다리기로 결정하고 끝내 칼을 거둔다. 그러나 그렇게 복수를 뒤로 미룬 대가는 햄릿 본인을 포함한 모두의 파멸이었다. 아쉬운 결과를 낳은 햄릿의 결정 때문에 혹자는 햄릿을 우유부단한 인물로 평가한다. 클로디어스가 홀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던 순간, 햄릿이 복수를 실행했다면 파국적인 결말은 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햄릿의 편에 서고 싶다. 단지 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 복수를 위한 정당한 명분을 확보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당시 햄릿이 내릴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햄릿은 클로디어스의 살인에 대한 어떠한 물증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햄릿이 클로디어스를 살해했다면 햄릿은 단순 반역자로 몰려 명예롭지 못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실제로 햄릿이 클로디어스를 칼로 찌른 순간, 그 광경을 지켜본 대중은 반역이 일어났다며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복수는 성공하지만 진실은 땅에 묻히고, 햄릿 본인은 후대에 불명예스럽게 기억될 선택이 과연 좋은 선택일까? 햄릿이 평민이었다면 뒤따를 결과를 전부 차치하고서라도 명분 없는 복수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햄릿은 왕자로서 국가와 백성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본인만을 위한 복수를 완성하고 산화하여 국가와 백성에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 과연 왕자로서 좋은 선택인 지 의문스럽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인지 아니면 햄릿의 천성이 원래부터 그러한지는 알 수 없으나 햄릿은 염세적인 모습을 자주 보인다. 좀 더 나쁘게 이야기하면 햄릿은 심사가 심하게 뒤틀려서 만약 햄릿이 왕족이 아니었다면 아마 질려버린 나머지 주변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에 냉소적인 햄릿이 때때로 주변인과 세상에 날리는 촌철살인은 햄릿 원작을 읽는 재미 요소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고 공감이 갔던 구절 몇 가지를 소개한다.
"절약이야 절약, 호레이쇼. 장례식 때 구운 고기, 혼례상에 차갑게 내놓았지."
「햄릿」, pg.27
부왕의 장례식이 끝나고 곧바로 클로디어스와 재혼한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에게 햄릿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장면이다. 장례식과 혼례식, 구운 고기와 차갑게 식은 고기가 대조되면서 기억에 남는 맛깔난 표현이 탄생하였다.
"그 대사를, 부탁인데, 내가 자네에게 암송해 준 대로 혓바닥이 춤추듯 읊어주게. 그렇지 않고 많은 배우들이 그리하듯 소리만 내지른다면, 차라리 읍내 포고꾼에게 내 글귀를 맡기겠어. 또 손으로 이렇게, 허공을 너무 자주 가르지 말고, 모든 것을 적당히 사용하라고. 왜냐하면 격정의 급류, 폭풍, 이를테면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자네는 그것을 매끄럽게 처리할 수 있는 절제를 습득하고 표출해야만 돼."
「햄릿」, pg.101
"그리고 광대역 하는 배우들이 주어진 대사보다 더 많이 말하지 않도록 하게 - 왜냐하면 개중엔 얼마간의 우둔한 관객들을 웃겨볼 요량으로, 자기네 스스로 웃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야. 그동안에 극에 필수적인 문제들을 고려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그건 한심한 일이고, 그런 걸 써먹는 광대의 가장 딱한 야심을 보여주는 셈이야. 가서 준비를 갖추게."
「햄릿」, pg.103
과하거나 억지스러운 퍼포먼스 없이 자연스럽게 관중의 호응을 이끌어 내는 공연자가 훌륭한 공연자라는 햄릿의 생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필자도 이에 굉장히 동감하는 바이다. 관객이 안쓰러움에 못 이겨 호응하도록 만드는 공연자는 그 노력은 인정하더라도 좋은 공연자라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저를 스펀지로 보십니까, 저하?"
"그럼, 왕의 총애와 보답과 권세를 빨아들이는 물건이지. 허나 그런 하수인들이 결국 왕에게 가장 잘 봉사하는 거야. 그는 원숭이처럼 그들을 입 한구석에 - 처음엔 넣고 있다가 마지막엔 삼키지. 그가 너희들이 긁어모은 게 필요할 땐, 짜기만 하면 너희들 스펀지는 다시 마를 거라고."
「햄릿」, pg.142
"이해 못 하겠습니다, 저하."
"그건 기쁜 일이야. 악담은 멍청한 귀 속에선 잠자는 법이거든."
「햄릿」, pg.143
햄릿이 클로디어스에게 충성하는 햄릿의 옛 친구에게 날리는 일침이다. 왕이 될 재목이 아닌 자에게 충성하여 얻는 부와 권력은 부질없다는 사실을 스펀지에 비유하여 전달하고 있다.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는 옛 친구를 참신한 표현으로 한 번 더 비꼬는 것이 재미있다.
"저 해골에도 한때는 혀가 있었고 노래할 수 있었겠지. 저 녀석이 그걸 땅에다 팽개치네, 마치 최초의 살인을 한 카인의 턱뼈나 되는 것처럼."
"그럴지도 모르지요, 왕자님."
"혹은 '아침 문안이오, 대감님. 안녕하시옵니까, 대감님' 하고 말하던 조신의 것일지도. 또는 달라고 조르는 뜻으로 아무 아무개 대신의 말을 칭찬하던 아무 아무개 대신일지도 모르고. 안 그런가?"
"예, 왕자님."
"허, 과연 그래. 헌데 지금은 턱 떨어져 구더기 마나님 밥이 되고, 묘파기꾼 삽질에 대갈통을 얻어맞네. 알아볼 재주만 있다면, 세상이 기막히게 도는 이치 여기 있구먼. 저 뼈다귀들을 키운 값이 던지기 노리갯감밖에 안 돼? 생각하니 내 뼈가 쑤시는군."
「햄릿」, pg.179
생전에 신분이 어떠했든 사후에는 결국 묘지기에게 유골이 내팽개쳐지는 신세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삶에 덧없음과 회의를 느낀 햄릿이 남긴 말이다. 왕자 신분에도 품위를 지키기는커녕 '대갈통'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없이 사용하는 모습에서 햄릿이 현생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 대목에서 클로디어스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에 대한 햄릿의 냉소도 엿볼 수 있었다.
햄릿을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결말부에서 급격하게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 진행이었다.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이야기의 초중반에는 갈등과 긴장감이 서서히 고조되다 마지막 스무 페이지를 남기고 거듭되는 우연 속에서 이야기가 한순간에 비극으로 끝난다. 셰익스피어가 작품을 써 내려갈 때 종이나 잉크가 부족했는지는 몰라도 결말이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바다로 나간 지 이틀이 못 되어 중무장한 해적선이 우릴 추격했네. 우리 배가 너무 느린지라 난 할 수 없이 용맹을 발휘했고, 접전 때 그들 배에 올랐어. 그 순간 그들은 우리 배와 떨어졌고, 나 혼자 포로가 되었지. 그들은 관대한 도적이나 된 것처럼 날 대접했어. 허나 왜 그랬는지 그들은 알지. 내가 선심을 베풀 차례야."
「햄릿」, pg.162
"선실에서 일어나, 선원 옷을 휘감아 걸치고 어둠 속에서 그들을 찾아 더듬다가 소원을 이루고, 그들의 꾸러미를 슬쩍한 뒤 내 방으로 되돌아와, 과감하게, 두려움 때문에 예절을 잊은 채, 그대의 중대 지령을 뜯어봤지. 내가 거기에서 알아낸 건, 호레이쇼 - 아, 왕의 악행! - 덴마크 및 영국 왕의 만수무강과 연결된 갖가지 잡다한 이유와, 호오! 내 목숨에 붙은 악귀와 도깨비로 점철된 정확한 명령, 즉 읽자마자 지체 없이, 아니 도끼날을 세우는 것조차 기다리지 말고 내 머릴 자르라는 말이었네."
「햄릿」, pg.190
"글쎄, 바로 그것조차 하늘이 보살폈어. 덴마크 옥새의 원본인 부친의 인장이 내 지갑 속에 있었어. 난 그 서찰을 같은 형태로 접고 서명하고 도장 찍어, 바꿔친 건 절대 몰래 감쪽같이 갖다 뒀지. 헌데 그다음 날 해전이 벌어졌고, 그에 뒤따라 일어난 일들은 자네가 이미 알고 있는 바야."
「햄릿」, pg.191
햄릿이 재상 폴로니어스를 죽인 사건으로 클로디어스는 햄릿을 영국으로 보낸다. 햄릿이 탄 배가 영국으로 향하던 중 햄릿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사신이 보관하고 있던 왕의 지령을 훔쳐 뜯어본다. 이를 통해 햄릿은 클로디어스의 음모를 눈치채고 원래 지령을 대체할 새로운 지령을 쓴다. 그리고 햄릿의 지갑 안에 우연히 들어 있던 덴마크 옥새 덕에 새로운 지령을 원본처럼 위조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던 중 햄릿이 탄 배가 해적을 만나게 되는데 햄릿은 해적들이 본인을 어떻게 대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용맹하게 해적의 배로 옮겨간다. 별다른 계책도 없이 막무가내로 해적의 배로 옮겨탔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해적들은 햄릿에 호의적이다. 그래서 햄릿은 해적들의 도움을 받아 덴마크로 귀환하게 된다.
그러나 평생에 걸친 운을 다 써버린 탓일까? 햄릿은 덴마크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죽을 운명인 인물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식의 결말이 영화 데스티네이션을 연상케 한다. 셰익스피어의 시대 또는 희곡의 특수성에 무지하여 하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영화를 보든 드라마를 보든 짜임새 있는 줄거리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필자로써는 이야기의 결말이 우연에 조금만 덜 의존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햄릿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줄거리와 희대의 명대사는 얼추 알고 있을 만큼 햄릿은 정말 유명한 작품이다. 그러나 너무 유명한 탓일까? 그동안 되려 원작을 읽어볼 시도를 하지 않았다. 마치 어렸을 때 읽었던 만화 삼국지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고, 이미 만화에서 재미를 충분히 느꼈기 때문에 삼국지연의를 읽어볼 시도를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 햄릿을 읽으며 원작을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수사적이고 비유적인 인물들의 대사가 난해하고 장황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러한 표현들을 곱씹어 보며 의미를 고민하다 보면 원작의 참맛이 배어나 어느새 그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은 특히 맛깔나게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용 출처 - 윌리엄 셰익스피어,「햄릿」, 최종철 역, 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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