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골드
열아홉에 그녀는 일본에 처음 왔다.
그리고 스물여섯 살이 된 지금도 일본에 살고 있다.
체감 기온이 45.93도, 실제 기온이 39도가
되는 습도 높은 날씨에도
양산도, 선글라스도 없이
교토의 거리를 누구보다도 씩씩하게 걸어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녀린 몸으로
더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는 얼굴로 날씨가 너무 좋다며
시원하고 똑 부러지는 목소리까지 내보인다.
앳된 얼굴에서는, 마치 시원한 탄산수 같은
청량함이 뿜어져 나온다.
뜨겁게 쏟아지는 햇빛에도 나무라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현재 자신의 일이 천직이라며,
너무 행복하다며 망설임 없이 이야기하는 그 모습이
당차고 싱그럽다. 어디선가 마치 레몬향이 풍겨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당장 내가 겪어내고 있는 더위를 물리치게 만들었다.
은각사를 돌아보고 나서, 우연히 함께 그녀와 단 둘이서만 거리를 내려오게 되었다.
자연스레 나란히 걸으며, 내 작은 양산 안으로 그녀가 천천히 살며시 들어오게 했다. 그렇게라도 나는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작은 응달을 선물하고 싶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작은 양산 아래에서, 길을 걸어 내려오며 이런저런 작은 대화들을 나누었다.
그녀는 일본이 좋다고 했다.
낮은 건물들, 일본 소도시의 시골 분위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고 했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그녀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요즘은 원래 잘 가지 않던 한국에 3개월마다 들어간다고 했다. 그 이유는 어느 날 마주한 부모님의 모습이 눈에 띄게 달라져 있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비가 많이 내렸었다며, 오늘은 비가 내리지 않고 날씨가 참 좋다며 웃음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비가 온날에는 비가 내려서 흠뻑 옷이 젖었지만, 금방 다시 날이 더워져서 옷이 쉽게 말랐다며 신나 했다.
그 모습이 무척 싱그럽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누군가로부터 느끼는 상쾌하고 산뜻한 기분이었다.
체감온도가 45.93도에 이르는 날에
나와 그녀는 웃으며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빛아래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믿기 어려웠다.
사람이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그리고 시원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메마른 나의 가슴에 오랫동안 기다렸던 단비가 다시 젖어들기 시작했다.
나의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음료수를 사주시며, 나에게 해주셨던 말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너희들도 더운 여름날에 누군가에게 시원한 음료수 같은 사람이 되어라”
그녀는 나한테 뜨겁게 타오르는 이 여름날 시원한 음료수 같은 사람이었다.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내야겠다고 깊은 마음속에 되새기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그녀는 단단히 선 채로, 여러 사람들의 눈앞에서, 자신이 일본에 처음 온 이유는 요리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미술을 전공했을 거 같은 들꽃 같은 몸으로, 그녀는 놀랍게도 일본에서 중국요리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일할 수 있는 현재 자신의 일이 더 좋아서 직업을 바꾸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인생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자기와 같은 인생을 보면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꼭 도전해 보셨으면 좋겠다는 단단한 말을 건넸다.
그 모습에서 크고 멋진 용기를 느꼈다.
그리고 메리골드라는 노래를 가녀리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불러내며,
그제야 그녀는 나이를 가늠할 수 있는 앳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행할 때마다 새로운 인연들을 나의 도화지에 담아낸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연은 단연코 그녀였다.
메리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