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04
최근 몇 주는 소설 읽는 맛이 뭐랄까, 싱거웠다. 집중이 쉽게 흐트러졌고, 왠지 모르게 둥둥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발은 분명 땅에 붙어 있는데, 바람 한 점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풍선처럼 어수선했다. 춘곤증인가. 분위기를 반전시킬 재밌는 소설이 필요했다. 가을부터 아껴두었던 히든카드, 『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꺼낼 수밖에.
문학상 수상 작품집 읽기는 내가 느끼는 가장 안전한 독서다.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한 권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수상작을 엄선한 노고에 기대어 깊이 있는 작품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이번에도 부푼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나는 여전히 당신의 밀도에 녹는다
- 허연, 「바닷가 풍습」 中)
첫 작품이자 대상 수상작, 편혜영의 <포도밭 묘지>를 읽으며 나는 이 시구를 떠올렸다. 노련하고 원숙한, 밀도 높은 문장들. 기대가 아깝지 않았다. 오소소 소름이 돋아 멈추다가도 그다음이 궁금해 곧바로 다시 글자를 쫓는 독서.
이 단편은 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네 친구를 따라간다. 누구는 은행에 누구는 기업에, 누구는 백화점 판매직으로 사회로의 첫발을 내딛지만, 출퇴근의 피로뿐 아니라 무언가를 감수하거나, 모멸감에 익숙해져야 하는 생활이 이어진다. 작품의 클라이맥스에서 이들은 운명처럼 포도밭에 당도한다.
소설을 읽으며 한편으로는 엄마 생각이 났다. ‘공부를 못하거나 대학에 가고 싶지 않아서’ 상고를 선택한 게 아닌 네 명의 친구들. 성년이 되기도 전에 출근을 시작한 어린 여자들. 그건 너무 엄마와 이모들의 이야기였다. 엄마는 종종, 스스로 돈을 벌어 동생들에게 용돈을 주고 집안 살림에 보탤 수 있었던 날들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끔은,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는 말도.
내가 아는 엄마는 걱정을 부풀리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엄마의 시원시원하고 명랑한 성격을 닮지 못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엄마가 원래부터 씩씩한 사람이었는지, 살다 보니 그런 사람이 된 건지 갑자기 알 수가 없어졌다. 전화를 걸었다.
“그땐 다 그랬지 뭐.”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상고에 갔다고, 그렇게 다들 일찍 철이 들었다고 했다. 전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응석 부릴 새 없이 주어진 몫의 ‘미래에 순응’하며 나아가는 어린 여성과, 고집도 피우고 하고 싶은 공부도 하며 자란, 그러나 어쩐지 철이 들지 못한 삼십 대의 나 사이를. 다행히 엄마의 목소리엔 흐린 구석이 없었다.
독서 생활에 불어든 춘곤증은 다행히 잘 물러간 듯하다. 좋은 소설은 봄을 맞은 나무처럼 가지를 뻗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이야기에서 삶으로 향하며, 주변과 나를 다시 보게 하는 것. 어느 저녁 느닷없이 엄마의 20대 시절을 나누게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으니까. 그 ‘밀도’에 또 한 번 녹아내리고자 다시 책을 꺼내 드는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