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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숭밤 Aug 25. 2023

가만한 당신, 나의 할머니

23/02/10

작년 늦봄에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가족들이 흩어진 뒤로 할머니를 만난 건 다섯 번이 채 되지 않았고 장례식마저 불참했던 나는, 이제 할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자주 잊다 다시 놀라곤 했다.


어렸을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부모님, 나, 동생까지 모두 한 집에 살았다. 몇몇 친구는 자라면서 은근한 차별을 느끼기도 했다지만 우리집에선 결코 그런 일이 없었다. 할머니에게 나는 귀한 맏아들이 낳은, 그보다 더 귀한 손녀딸이었으므로. 커다란 눈에 큰 키, 당시로서는 드물게 세련된 이름을 가진 나의 할머니는 내가 여덟 살이었던 해 쓰러져, 침대에서 여생을 보냈다.


<가만한 당신 세 번째>는 기자 최윤필이 연재한 부고 기사 칼럼을 모은 책이다. 단신으로 게재되는 부고와 달리, 더 알려져야 할 인물들의 삶을 찬찬히 돌아보고 예의 있게 다가선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더 나은 사회를 꿈꿨던 사람들. 부고를 읽고서야 알게 된 이름들이지만, 한 문장 한 문장 그들의 인생이 묵직하게 흘러들어와, 나도 천천히 길게 읽었다.


사실 할머니가 겹쳐진 건 첫 번째 부고를 읽으면서부터였다. 강단 있고 에너지 넘친 최초의 여성 스쿠버 강사, 도티 프레이저로부터 그처럼 카리스마 있고 영민했던 내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다른 시대,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인생을 살았다면 얼마나 더 대단한 사람이 되었을까. 마지막 인물 사진가 김일주는 공교롭게도 1942년생, 우리 할머니와 동갑이었다.


전화를 걸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 할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묻자, 아빠는 마치 기다려온 질문이라도 받은 듯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실 7살인 내 눈에도 할머니는 좀 다른 데가 있었다. 사람이 늘 따랐고 판단이 빨랐으며, 손도 목소리도 컸다. 호피무늬 마후라를 두른 그녀가 자랑스레 소싯적 이야기를 꺼내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빠의 입에서 나온 말로는 더 대단했다. 시선을 모을 줄 알고 장사 수완까지 좋았던 할머니는 그 시절 서울에 2층 양옥집을 장만할 정도로 방앗간을 키워냈다. 베푸는 정도 많았던 지라 고향 장흥의 지인들에게 종종 서울 일자리를 얻어주었는데, 와병 이후로 왕래가 끊긴 줄 알았던 그들이 장례식에 찾아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했다.


별똥별이 가득한 광경을 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이야기를 마친 아빠도 아쉬움이나 그리움으로 표현하기엔 보다 큰 무언가를 느끼는 듯했다.


몸에 갇혀 23년을 보낸 할머니는 싱그러운 5월의 어느 날, 아침밥을 드신 후 잠든 듯 생을 떠났다. 가시는 순간은 편안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향년 만 8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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