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7
높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평면국 사람들을 상상해 보자. 그들의 잔잔한 일상에 갑자기 사과 하나가 나타나 인사를 건넨다. 2차원 세상에 출현한 3차원 물체. 평면국 사람들은 사과를 어떤 모습으로 인지할까?
천문학자 칼 세이건에 의하면 그들은 부분적인 단면으로만 사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사과에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으면 남는, 딱 그만큼으로만 이해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사과는 열심히 자신의 모습을 설명하지만 평평한 세계의 인간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반면 높이를 아는 우리는 사족 없이도 사과를 볼 수 있다. 꼭지 부분이 살짝 파여 있고, 주먹보다 약간 큰 입체로서의 사과. 그렇다면 우리에게 4차원은 어떻게 다가올까?
우리는 이미 경험한 시간을 과거,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미래라 말하며, 시간이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시간이란 인간이 발명한 개념이다. 평면국 사람들이 높이가 있는 사과를 단면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처럼, 3차원의 우리는 시간을 부분적으로만 경험한다. 3차원 공간이 그다음 3차원 공간으로 넘어가는 것을 ’시간이 흐른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에겐 혼란스럽기만한 4차원의 세계에서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사과 한 알처럼 이미 전부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의 관점이나 생각이 차원의 문제에서는 우스울 정도로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김연수의 소설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없으며,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인간의 비극은 ‘지나온 시간에만 의미를 두고’ 원인을 찾는 데 있다, 소설은 그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편이 체념이나 절망의 분위기로 흘러가는 건 아니다. 소설 속 다른 이야기에서는 ‘미래에서 과거로 진행되는 인생을 한 번 더 살아가게 된’ 연인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마지막 선택은 바로 미래를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삶이다. 여기에 핵심이 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시간을 분절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에겐 상상이라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
소설에서 그려지는 미래는 주인공들의 말마따나 ‘너무나 평범’하다.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고 20년 전의 연인은 부부가 되어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다. 내 미래는 어떨까. 나에게도 그런 미래가 올까. 아늑한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사랑하는 누군가와 담담히 내일을 낙관하는 일상. 아무래도 지금은 ‘신의 말’처럼 생경하지만.
작품 속 인물이 말하듯, 어쨌거나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은 나 스스로가 달라지는 데 있다. 미래를 볼 수 없다면, 미래를 상상하면 된다. 포기하지 않으면, 그 미래가 평범한 지금으로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가까워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