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21
중학교 2학년 때 국어 선생님은 체구가 작고 눈빛이 또렷한 사람이었다. 수업 종이 울리면 한쪽 옆구리에 교과서를 낀 선생님이 드르륵 문을 열고 나타났다. 벌써 15년도 더 지난 일이라 그때 선생님과 함께 읽었던 시가 무엇이었는지, 어떤 문법을 배웠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딱 하나 선생님이 매일 국어사전을 본다고 했던 말은 지금까지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선생님은 침대 옆 협탁에 늘 국어사전을 둔다고 하셨다. 자기 전에 몇 장씩 사전을 들춰 보며 단어들을 헤아린다고. 열다섯 살이었던 우리는 그럴 리가 없다며 애정 섞인 야유를 보냈다. 억울하다는 선생님의 눈과,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누가 국어사전을 매일 봐요, 그런 장난 반 진담 반의 목소리들. 나 역시도 선생님이 부러 꾸며낸 이야기일 거라 짐작하며 웃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이만큼 시간이 흐른 지금, 비로소 선생님이 결백했다는 걸 안다. 문자 그대로의 ‘매일’은 과장일지 몰라도, 머리맡에 사전이 있는 풍경은 당시 생각하던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나도 핸드폰 홈 화면과 컴퓨터 즐겨찾기에 사전을 넣어놓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전을 가까이하게 된 무렵은 도서관을 자주 들락거리던 대학 시절의 여름과 맞물린다. 허우룩한 마음을 활자를 읽어내는 일로 메우려 했던 날들이었다. 그때 읽은 소설들에 모르는 말이 수두룩했다. 무망하다, 비척이다, 데데하다…. 책을 읽다 말고 단어를 찾아보았다. 앞뒤 문장으로 뜻을 유추할 수도 있었지만 정확하게 알고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이렇게 알게 된 단어를 다른 텍스트에서 다시 만났을 때 느낀 즐거움이란.
이때 자리잡은 습관은 요즘 더 빛을 발하는데, 언젠가부터 포털 사이트의 사전들이 ‘우리말 바로 쓰기’라는 서비스를 함께 제공하기 때문이다. 등재된 단어만 검색할 수 있었던 예전과 달리 올바른 맞춤법이나 표기법을 확인할 때도 사전을 활용할 수 있다. 가령 ‘좋을 텐데’의 올바른 띄어쓰기가 아리송하다면, 먼지 쌓인 어문 규정집을 펼칠 게 아니라 국어사전 앱을 켜 알아보면 되는 식이다.
물론 열심히 사전을 활용한다고 해서 언제나 맞춤법과 표기법이 완벽한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실은 며칠 전 완성한 원고에 틀리게 쓴 표현이 있다는 걸 며칠 전에야 알았다. 쓰는 동안에는 이상하게 생각지 못했는데, 문득 떠올라 사전에 ‘한 켠’을 검색해 보니, ‘켠’은 ‘편’의 잘못이라고 써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국어 선생님이 굳이 더 찾아볼 단어가 뭐가 있나. 그땐 그렇게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왜 저녁마다 사전을 열어 본다고 하셨는지 이젠 알 것 같다. 모르는 말은 너무나 많고 내가 안다고 여기는 것들도 다 맞는 게 아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몇 번씩 사전을 뒤적거리며 원고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