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3
이십 대 초반, 취향이라 명명하고 싶은 것들이 조금씩 뚜렷해졌다. 당장 향유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 ‘쿨하다’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이미지들이었다. 이를테면 해가 넘어가는 오후에 가만히 앉아 재즈를 듣거나,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말 걸기, 주중엔 열심히 일하고 주말엔 수영을 하는 규칙적인 생활. 왠지 모르게 기시감이 든다면, 맞다. 당신은 분명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장 유명한 『상실의 시대』로 처음 접했다. 호리호리한 사람 왼편으로 보라색 제목이 번져 있는 옛날 책이었다. 담백한 문장과 어딘지 모르게 자욱한 안개 같은 이야기. 너무 야해서 당혹스럽긴 했지만, 잠을 아끼며 읽을 정도로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성인이 된 후로는 더 열렬히 그의 텍스트를 찾아 읽었다. 현실과 비현실을 가로지르는 기묘한 이야기들을 벅찬 마음으로 유영했다. 무라카미 특유의 리듬을 좋아했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갑자기 닥친 미스터리한 사건이라든가 고양이와 말을 주고받는 이상한 장면들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나에겐 하루키의 스토리가 난해하다는 평이 더 의아했으니.
“설명을 안 하면 그걸 모른다는 건,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는 거야.”
―무라카미 하루키, 『1Q84』, 217쪽
내 말이 그 말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나에게는 다른 기준들이 생겨났다. 하루키의 소설이 내 생각과 엇비끼는 경우가 종종 벌어졌고, 그게 애석하지 않을 만큼 열정도 옅어졌다. 그러나 어쩐지 스물한두 살 무렵에 자리잡은 ‘쿨한 이미지들’은 여전히 그 무게로 남아 있었다. 도로에서 골프를 만나면 사라를 찾아가는 다자키 쓰쿠루가 떠오르고, 달이 높게 뜬 밤 우연히 놀이터를 지나면 문득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들어앉은 심상이 정말 내가 되기도 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는 단순히 멋지다고만 생각했다. 무라카미의 규칙적인 생활과 러닝을 향한 진심이 다른 우주의 풍경처럼 우아해 보였고, 소설가가 된다면 나도 달리기를 해야지, 그런 멀고도 낭만적인 상상을 얹었다.
그때 스며든 씨앗이 몇 년 뒤에 발아했다. 어느 날 산책 중에 갑자기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뛰고 나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리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난리가 나는데, 개운했다. 달릴 때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 호흡과 공기의 저항을 느끼며 그저 달리는 것. 나는 러닝을 좋아하게 되었다.
올해 오랜만에 무라카미 아저씨의 신작이 출간된다고 한다. 책이 나오기 전에 많이 달려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하루키의 소설을 집으면 분명 한동안 밖에 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마침 달리기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