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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뮤엘 Aug 01. 2024

다큐<조선인 여공의 노래> #04

무작정 오사카로 가다. 


수년 동안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기획서를 써야 했다. 

그리고 충분하진 않았지만, 영화를 시작할 수 있는 비용이 마련됐다. 

나는 무작정 오사카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존재했다. 

바로... 코로나였다.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는 2022년에도 여전히 전세계를 돌고 있었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내겐 시간이 없었다. 

당시 조선인 여공들에 대한 증언을 해줄 분을 찾고 싶었는데 

현실적으로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대부분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빨리 오사카로 가야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일본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관광 비자로는 갈 수가 없었고, 

유학생들도 일본으로 가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 방법을 찾다가 우리는 비지니스 비자를 받기로 했고 

아는 분이 속한 법인의 도움을 통해 가까스로 비지니스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예방접종을 3차까지 맞아야 했고, 

PCR 검사도 출국에 한번, 입국시에 한번,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도 한번, 도착해서도 한번. 

총 4번의 검사를 받아야 했다. 

스탭들이 모두 해야 했기 때문에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는 비자를 받아 일본에 도착했다. 

한국인들은 우리들 뿐처럼 보였다. 

현지의 분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일본에 왔냐고 의아해 했다. 

어렵게 도착했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아무도 관광으로 오사카를 가지 않았던 코로나 시기 였기 때문에 

3층짜리 주택을 통채로 빌릴 수 있었고 아주 저렴한 가격에 빌렸다. 


우리는 무조건 오사카에 도착해, 재일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집단 거주지인 이쿠노구로 갔다. 

츠루하시 시장과 코리안 타운을 돌며 증언자를 찾는다는 내용이 적힌 엽서를 뿌리기 시작했다. 

엽서는 이미 한국에서 제작해 간 것이었다. 

당시 제작했던 엽서의 뒷장 (c)정감스토리




하지만 증언자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100년전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증어해줄 분들이 생존해 계신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 

증언자들을 찾는 것도 중요했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관련 전문가를 만나는 일이었다. 

조선인 여공들에 대한 책을 쓰고 필드 워크를 진행했던 

히구치 요이치 선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목사님이었다. 

그가 부임한 교회는 오사카의 키시와다 교회였는데, 

그는 자신이 부임한 키시와다 지역을 조사하다가 

조선인 여공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들의 슬픈 사연을 꼭 기록하고 싶어 연구하고 찾아다녔고 책을 섰던 것이다. 

하지만 오사카 키시와다에서 히구치 요이치 목사님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몇년전에 오사카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시마바라 라는 지역의 교회로 

떠난 뒤였다.


나는 오래전에 만난 뵌 적이 있던 후쿠오카에 계신 목사님에게 연락을 취했다. 

후쿠오카와 시마바라는 그래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편이었고, 

같은 목사님이라면 설사 교단이 다르더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분은 히구치 요이치 목사님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분은 결국 히구치 요이치 목사의 연락처를 알아내 나에게 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6월이 시작되는 어느날 우리는 만날 수 있었다. 


히구치 요이치 목사님은 언젠가 누군가, 조선인 여공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며 그런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역시, 누군가 사라져 가는 잊혀진 조선인 여공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정리하고 연구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그 사람을 만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히구치 요이치 목사님을 통해 나는 책과 기록에만 남아 있던 장소 곳곳을 

실재로 돌아볼 수 있었다. 

목사님은 자세한 주소지마저 정리해서 갖고 계셨고

나는 신나게 그 곳을 돌아디니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미 자료 조사를 통해 알던 이야기들은 공감하며 들었고 

모르던 이야기들은 기록하고 또 정리하고 촬영했다. 

더운 날 촬영 중에 쉬고 계신 히구치 요이치 센세.(c)정감스토리




그러면서 나는 여러 책에 나온 증언자들의 증언만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증언집을 만든 것이다. 

김찬정 작가의 <조선인 여공의 노래> 책에 나온 증언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

여공들은 항상 힘들게 일했지만 먹는 게 많이 부실했지. 그래서 병이라도 나면 많이 죽었어. 

그런데 조선인 여공은 일본 여공보다 그렇게 많이 죽지는 않았어, 지금 생각해 보면 

먹는 게 달라서였던 같아. 일본인 여공은 좋은 거 먹는다고 해봐야 말린 정어리 정도였는데 

조선인 여공은 돼지나 소 내장을 얻어 와서 삶아 먹었기 때문에 영양상태가 좋았어. 소나 

돼지 내장은 지금은 그야말로 좋은 먹거린데 당시는 버리든지 밭에 거름으로나 썼지. 버리 

는걸 조선여공들한테 공짜로 주니까 얻어와서 먹을 수 있었던게야. 그래서 염병에 걸려도 

일본 여공보다 병을 잘 이겼던거야......(야마모토 타츠오) 

女工は、伝染病にかかれば、日頃、栄養が悪いから、死ぬ率が高かったが、朝鮮人の女工は日 

本人に比べてあまり死ななかったねえ。今考えてみれば、食べ物がちょっと違っていたからだ 

ろう。日本人の女工はタクアンやよくてもめざしくらいだが、朝鮮人の女工は豚や牛のモツ 

(臓物)をもらって食べていたから栄養がよかった。牛や豚のモツはいまでこそ売り物になっ 

ているが、当時は捨てるか畠に肥料にしていた。そんなもんだから、もらいにいけば、ただで 

くれるから食べれたんだろうね。それが結果的には、伝染病にかかっても日本人より生きのび 

たんだろうね......。 

** 


촬영이 끝나고 스탭들은 잠이 든 밤부터 새벽까지 

그 증언들을 정리하고 읽고 또 읽으며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존귀한 자로 만드셨다. 

그 존귀함이 누군가에 의해, 어떤 상황에 의해 무너질때 

그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증언 기록들은 

배우들의 목소리와 감정을 통해, 

그렇게 기록되기 시작했다. 


테라다 방적 공장 앞에서 증언 낭독하는 배우 조청향 (c)정감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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