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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뮤엘 Feb 12. 2024

다큐 <조선인 여공의 노래> #03

조선의 돼지들 



2017년 부터 나는 조선인 여공들에 대해 공부를 하며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1910년대 이후 오사카 방적공장에서 일한 조선인 여공들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관련 논문을 찾아보고, 일제 강점기 시대에 왜 조선 여자들이 오사카로 가서 방적공장에서 일해야 했는지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에 대해서는 너무나 방대하고 다양한 연구가 있었고, 그런 기존 연구들은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1910년대 일본으로 간 조선인 여공들에 대한 책은 없었으며 국내 논문만 몇개 존재했다. 

그리고 국내 논문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출간된 1980년대의 어느 한 책을 집중적으로 인용하고 있었다. 


조선인 여공들에 대한 국내 논문들은 1980년대에 쓰여진 일본의 그 책을 인용해 정리한 수준이었다. 

국내의 연구자들이 독자적인 연구를 할 수 없는 듯 했다. 

이미 증언자들이 많이 사망했고, 강제 징용과 위안부 문제에 연구가 집중되다보니 그럴 수도 있었다. 

일본의 논문과 책을 거의 배낀 듯한 논문도 있어서 당혹스럽고 놀랐다. 

1980년대에 쓰여진 그 일본 책이 무엇이길래, 그 책을 다 인용한 것일까? 

나는 그 일본 책을 읽고 싶어졌다. 


그 책은 <朝鮮人女工のうた(조선인 여공의 노래)> 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김찬정 <조선인 여공의 노래> / 1983, 이와나미 서점




나는 아내가 일본 출장을 갈때 일본의 서점에서 사달라고 부탁했지만, 

아내는 그 책이 너무 옛날 책이라 서점에 없어서 사오지 못했다.  

결국 일본 아마존을 통해 중고책으로 구입했다. 

2017년 겨울에 그 책은 바다를 건너 우리집에 도착했다. 


책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1883년 8월 이와나미에서 나온 책이다.

책의 저자는 김찬정이라는 재일교포였다. 

저자 김찬정 선생은 <재일 한국인 백년사> 등과 같은 좋은 책을 쓰신 분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 책은 1910년대부터 자의로 혹은 강제로 일본 오사카의 방적 공장에서 일하게 된 

조선인 여공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는 수년동안 광범위한 오사카 지역과 타 지역까지 돌아다니며 여공들의 증언을 채집했다. 

책을 읽다보면, 작가인 김찬정 선생의 절박함이 느껴졌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조선인 여공들, 그리고 그녀들의 삶의 이야기들은 김찬정 작가가 증언을 채집하던 1980년 당시에도 사라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증언들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열정을 불태웠다. 


책 내용의 대부분은 충격적이었으며 너무나 인상깊은 내용들로 가득했다. 

디아스포라 여성들의 삶이 이랬구나.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었지? 

안타까움과 슬픔, 그리고 아픔이 한동안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왜 이런 역사의 이야기를 나는 이제 알게 된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역사는 어떤 커다란 사건이나 인물들을 따라가고, 그것을 기록하지만 

민중들과 그 시대를 살아내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들까지 다 기록하기엔 너무 방대하다. 

하지만 작가는 그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보석같은 진실과 아픔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같이 그 아픔들에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고 있었다. 



오사카항에 도착하는 조선인들 1920년대



책 내용에는 조선의 돼지들이라고 놀림 받던 여공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의 돼지들로 불리우며 온갖 멸시와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살아남아야 했던 조선 여성들의 이야기가 책에 가득하다.



키시와다 조선인 여공들의 식사 장면 



그녀들은 상한 음식을 먹어야 했고, 일본인들이 버린 육류의 내장을 구해서 구워 먹으며 그녀들은 버텼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인들은 육류를 먹지 않았다. 1910년대에는 육류를 섭취하긴 했지만, 육류의 내장을 조리하거나 먹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도축 과정에서 육류의 내장을 쓰레기로 버렸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육류의 내장에 대한 조리법이 있었고 심지어 피를 응고시킨 선지도 먹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쓰레기로 버린 육류의 내장은 여공들의 육체를 지탱하는 먹을거리로 사용될 수 있었다.

오사카 사투리로 쓰레기를 호루몬이라고 하는데, 육류의 내장을 호루몬이라고 불렀다. 

그 호루몬, 즉 쓰레기를 주워서 구워 먹으며 버텼던 조선인들을 보면서, 호루몬구이라는 음식이 나오게 되었고, 일본인들도 호루몬을 먹게 된 것이다. 호루몬은 육류의 내장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처럼 변한 것이다. 

오늘날 일본인들에게 호루몬 구이는 인기 음식이며 고급 음식이다. 

한때는 쓰레기로 버린 호루몬이 이제는 일본의 인기 음식이 된 시간의 아이러니는 마치 한때는 쓰레기 대우를 받던 조선인 여공들이 지금은 일본의 재일 조선인들의 1세대가 되어 가족을 지키고 그들의 사업을 확장하며 일본 사회 속에서 밀리지 않고 자리잡은 그 시간의 아이러니와 묘하게 닮아 있다. 


  

호루몬 구이 (c)정감스토리


(* 일본 오사카에서 육류의 내장 요리를 호루몬 이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긴 하다. 조선인들이 먹던 호루몬이 인기가 높아지자, 일본인 사업가가 의학용어인 호르몬에서 따와서 건강의 이미지를 합해 상표를 등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식당은 호루몬이 그렇게 많은 수익을 내지 못하자, 오무라이스로 주종목을 바꿨다. 그리고 그 오무라이스 집은 오사카에서 가장 오래된 오무라이스집이 되었는데, 그 집의 이름은 홋쿄쿠세이다. 오사카로 관광을 가는 한국인들에게도 맛집으로 알려져 있는데, 홋쿄쿠세이에 조선인들과 호루몬에 대한  사연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식당 입구를 자세히 보면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1910년대 이후 일본 오사카의 대규모 방적 공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여공들은 그곳에서 가족을 이루기 시작했고 아이도 낳았다. 

조선 여공들은 아이들에게 젖먹일 시간도 부족한 채 일을 해야 했다.

점심시간은 30분이었는데, 그 시간에 아기를 데려와 모유수유를 하다보면 자신들이 밥 먹을 시간이 없었다. 

아기의 울음소리, 먹은 것이 별로 없어 젖이 나오지 않는 상황, 그 증언들의 기록에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일본에 정착해 살아간 재일교포 1~2세들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곳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불합리한 처우개선과 삭감된 임금에 대해 파업을 시도했다.

1930년대에 그녀들의 파업이야기를 읽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파업으로 인해 그녀들은 엄청난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상애단이라는 조직과 일본 경찰들의 가혹한 폭력과 고문을 견뎌야 했다.

그 내용들이 책에 나오는데, 여기에 밝힐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참혹하다.

일본에서 가장 가난한 노동자, 그거도 여성 노동자들, 그 약자의 위치에서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일본 여공들도 파업을 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여공들의 파업은 대단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파업 상황에 대해서 다양한 증언들이 있었는데, 결국 파업에 성공하지 못하게 될 걸 직감한 일부 여공들이 남아 있는 조선인 여공들에게 미안하다며 용서를 구하고 파업을 그만둔 채 공장으로 돌아가는 대목에선 더 읽을 수 없어 잠시 멈추었다.



붉은 댕기 (c)정감스토리



인간의 역사는 왜 이리 난해하고 고통스러운 역사를 수반하는 것일까? 잠시 먹먹해졌다.

파업은 실패했지만 조선인인 그녀들은 다음날 출근길에서 머리에 붉은 댕기를 매고 출근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녀들의 파업은 실패했지만, 결코 자신들은 패자가 아니라는 것을 당당히 보여주듯 최후까지 굴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학교를 다닐때 배운 일제 강점기 시대의 역사는 대부분 대한민국에서 기록하고 바라본 역사이다.

그리고 그 역사들은 대부분 살아 있는 증언의 역사들이 아닌 피해자의 시각에서 기록된 정형화되고 정제된 역사의 기록들이다.


하지만 김찬정 선생의 글들을 통해 당시 조선인 여공들이 경험한 시대의 증언을 읽다보면 내가 배운 역사와는 미묘한 다름이 보인다.

조선인들은 자주적이었고 강했다. 그것은 어떤 민족성에 기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억압과 고통의 역사 속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고 저항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저항이 독립을 향한 저항의 관점이 아닌, 살기 위한 처우 개선과 인간적인 대우를 위해, 즉 인권을 위해서도 투쟁했다는 것이 놀랍고 감동적이다.


  

작가 김찬정 선생은 맺는 말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근대 일본 자본주의 발전의 그늘에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더욱 학대받으며 착취당한 방적 여공들, 그 일본의 방적 공장 여공으로서 많은 조선인 여성들이 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그녀들의 이야기를 조선과 일본의 불행한 근 현대사의 관계 속에서 포착해 당시 실태를 밝히고 싶었다.


거기에는 재일 조선인들이 수난의 역사를 명백히 밝히고 그 경험을 토대로 조일 관계를 눈여겨 보고 우리와 같은 재일 조선인들의 이후의 삶에 시사되는 바가 있다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것이 할머니들의 자녀로 이 이국에 태어나 자라고 이후에도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을 읽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재일 교포의 한 사람으로 역사의 증인으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사명의 이유를 적은 그의 글에 처연함이 느껴졌고 슬픔이 느꼈지만 동시에 결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뿐만이 아니라,

각 시대 시대 마다에는 그 시대에 있었던 감춰져 있는 진실들이 존재한다.

그 감춰진 진실들은 영원히 묻히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진실들이 드러나기도 한다.

은폐된 진실들을 끄집어 내어 진실을 알리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기에 역사는 진실을 말할 수 있고, 그 진실을 통해

새로운 미래와 관계의 전환을 맞기도 하고, 긍정적인 앞날을 내다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진실을 알리는 자들의 노력과 수고는 안타깝게도 그 시대를 지나 한참 뒤에야 알려지곤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열성적인 증인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여러 기사들과 글을 통해 알아보니, 김찬정 선생은 수년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2018년 즈음, 나는 수소문을 해서라도 한번 만나뵙고 싶었는데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마음은 그의 책들을 통해 이어져 갈 것이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 책속의 여공들은 대부분 당시 키시와다 방적 공장의 여공들 이었다.

그들은 인근 묘지에 이름도 묘비도 없이 묻혔는데, 2017년 그곳의 흔적을 찾아갔던 때가 떠올랐다.

동네 안에 자리잡은 수천개, 아니 수만개 이상의 묘비가 세워진 무덤군들을 보며,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는 조선인 여공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어졌다. 



- 다음에 계속 - 







#조선여공, #조선인 여공의 노래, #호루몬

*일부 사진의 저작권은 정감스토리에 있습니다. 복제와 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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