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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 샘솟는 옹달샘 Nov 07. 2024

내 안에 하나뿐인 장미꽃 있다

십 년이 지나도 백 년이 지나도 천 년이 지나도 나는 너를 못 잊어

  "이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구?"

  "(......) 10년 됐잖아. 갈 때가 된 거야. 이제 버리자."

  "아니, 이게 어떤 건데 버려. 우리 신혼 집들이 선물로 받은 거라구. 얼마나 추억이 많이 깃들어있는데. 못 버려."


  요즘 내 가슴을 후벼 파는 말. 십 년 됐잖아. 십 년이 무슨 대수라고 줄줄이 이별을 고하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그렇게 오늘도 또 하나가 내 곁을 떠나갔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10년을 채우고 말이다. 잔인하다. 텔레비전과 이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선청소기 너마저. 조금만 더 있어줄 수는 없었니? 조금만 더 버텨주지.


  "다 이고 살 수는 없어."


내 맘을 읽기라도 한 듯이 여보가 말한다.


그래 알아. 모두 다 이고 살 수는 없지. 하지만 다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슬픈 걸 어떻게 해.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무엇이든 차곡차곡 모았다. 티켓이나 관람권은 물론이고 친구와 주고받은 쪽지, 잠깐 쓴 메모. 심지어 판 귀지나 자른 손톱을 버릴 때도 시간이 필요했다. 모든 것이 소중했다. 내게 더 이상 필요 없는 것들까지 말이다. 미술도구가 그 대표적. 학창 시절이 끝나고 더 이상 내 인생에서 미술도구가 필요 없는 시기가 도래했을 때도 난 더 이상 수납할 수 없는 공간 속에서 고민에 빠졌다. 미술 과목을 제일 싫어했던 내가 이 도구들을 다시 쓸 일은 절대 없을 것이 자명했음에도. 고군분투했던 미술시간 속 내 손길이 담긴 미술도구들을 버리는 것은 꼭 나를 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구박 속에서도 난 미술도구들을 굳건히 지켜냈다. 내가 쓸 일은 없겠지만 내 딸들에게 물려주겠다는 꿈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리고.

  20년 후 난 꿈을 이뤘다. 내가 쓰던 팔레트를 이름만 바꿔달아 우리 첫째 딸이 쓰고 있다. 나의 미술 시간과 함께 했던 팔레트가 딸의 미술 시간과 함께 할 수 있게 되다니. 꿈꾸던 일이 현실이 되었고 생각할수록 가슴 벅차게 감동스럽다.



  그래 알아. 고장 난 너를 우리 햇살이가 결혼할 때 줄 수 없으니까. 팔레트랑 또 다르다는 걸. 그래도 힘을 잃은 너를 버리는 선택밖에 할 수가 없다는 게 한없이 슬픈 걸 어떻게 해.

 

  "사진 찍어야지."


버리자고 말했던 거 미안했던지 무선청소기를 내 곁에 내민다. 눈에 선하다. 너를 만난 날이. 거실에 어깨를 따닥따닥 마주대고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삼계탕을 먹던 날이었는데.


  "(촬칵)"

  "이제 밖에 갔다 놓아도 되지?"


조심스럽게 묻는다. 네가 이 집 밖으로 나가면 이제 정말 영영 우리는 만날 수 없는 거잖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지난 추억이 아련하다.


  "이렇게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 아쉬워."

  "그럼 뭘 더 어떻게 해줄까?"

  "여보가 청소기 옆에 서줘. 혼자 찍으니 외로워 보인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표정으로. 청소기를 들고 옆에 서서) 이렇게? 자 이제 찍어줘."

  "(촬칵)"


사진 속에 십 년 된 청소기와 십 년을 함께 한 여보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20년을 함께한 내사랑이 있다.

오랜 시간 내 옆을 지켜주는 내 하나뿐인 장미꽃이 있다.



 

  하나뿐인 장미꽃. 우리의 애칭. 2003년 2월 22일 우리의 역사가 시작되던 날, 난 고심 끝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어린 왕자에서 이 애칭을 가져왔다. 초등학교 2학년 선생님께서 전근을 가시면서 나에게 남겨주신 책. 그래서 수없이 읽었던 그 책. 때마다 다가오는 부분이 달랐지만 대학 입학을 앞둔 파릇파릇한 나에게 가장 환상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장미꽃이 하나뿐인 장미꽃으로 되어가는 서사였다. 정말 멋졌다. 무수히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길들임을 통해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남자친구가 생기면 꼭 하나뿐인 장미꽃이라 부르리라 결심했다. 생겼고 불렀고 길들여졌으며 이름대로 되었다.


  " 네 장미꽃을 위해서 네가 허비한 시간 때문에 장미꽃이 그렇게 소중해진 거야.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영원히 네가 책임을 지게 되는 거야."                     -어린 왕자 중-


2004년, 하나뿐인 장미꽃이 나에게 선물해 준 십자수


  시간은 관계를 소중하게 만든다. 나와 함께 한 모든 너희들이 소중했던 이유이며 하나뿐인 장미꽃이 나에게 유일한 이유이다. 내 안에 하나뿐인 장미꽃이 있다. 수많은 장미꽃 중에서 단 하나뿐인 장미꽃이 내 안에 존재한다. 모두 다 떠난다 하더라도 언제나 변함없이 내 안에 하나뿐인 장미꽃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모든 이별에서 나를 지켜준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아름다움은 시들어가겠지만

생각대로 되지만은 않아도 또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기에.

사랑은 결코 지지 않기에.

오늘도 서로에게 물들어 간다.




고마워.

내 이별 의식에 기꺼이 동참해 줘서.

청소기 옆에서 브이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한 번씩 이럴 때마다 내가 심쿵한다니까.

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어두운 밤마다 나의 발을 주물러주며 아픈 곳이 있는지 살펴봐준 것도.

예민해져서 한없이 날카로워져 있을 때 그럴 수도 있다며 유연한 생각을 가져다준 것도.     

속상한 일 때문에 엉엉 울면서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묵묵히 들어주며 등을 토닥거려 준 것도.    

무언가에 자신 없어 망설이고 있을 때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지금처럼만 해도 된다고 격려해 준 것도.

모두모두 고마워.

모든 것들은 사라지지만 우리 지금처럼 같이하며 함께 기억하자

그리고 내가 계속 말하지만 내가 혹시 먼저 죽어도 절대 다른 여자랑 결혼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내가 천국에서 만나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우리 햇살이와 나무도 아빠를 가만두지 않는다고 했으니 생각도 하지 말구.

십 년이 지나도 백 년이 지나도 천 년이 지나도 나는 내사랑을 못 잊으니까 내사랑도 나만 바라보기.

(내가 읽고도 흡사 2024년판 미저리가 따로 없지만. 이건 너에게 바치는 나의 절절한 사랑 노래.)

사랑해.

내 하나뿐인 장미꽃.

                 

우리의 커플 컵, 딱 내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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