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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담 Feb 06. 2022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

영화 비평: 감독의 스타일

흑인과 인종차별을 다룬 영화로 유명한 감독,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는 미국 사회내 인종간의 갈등을 다룬 영화이다. 흑인, 아시아인, 백인, 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들이 찌는 듯한 더위의 브루클린 지역에서 살고 있다. 영화는 계속해서 브루클린의 엄청난 더위와 이글거리는 햇볕, 그리고 날씨로 인한 불쾌지수를 강조한다. 등장인물들은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서로를 향한 증오와 분노를 쌓아가고 있다. 호감이나 공감이 가는 인물도, 전형적이고 모범적인 인물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 동네에서 감독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을까? 이 영화는 인물 설정뿐만 아니라 서사 구조, 촬영, 연출에서도 비전형적인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감독의 강렬한 스타일에서 우리는 보다 많은 메시지를 얻게 된다.

관객은 영화에서 ‘혼란스럽다’와 ‘’불친절하다‘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수평이 맞지 않는 카메라 앵글, 두 번씩이나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무키와 여자친구의 키스씬, 개연성 없이 등장하는 샷 등 기존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샷이 가득하다. 쌀의 피자가게에서 쌀과 라디오 에힘이 말다툼을 하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때, 이들의 시선의 방향은 180도 법칙에 따라 그려지지 않는다. 인물들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을 하고 이는 마치 관객에게 직접 대사를 건네는 것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영화 도중에 네러티브와 큰 상관 없는 시퀀스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인물들이 차례로 나와 카메라를 응시하며 특정 인종을 비난하는 장면이 그 예다.

 

그러나 영화 속 낯선 기법들은 철저히 감독의 의도 아래에 이루어진 것이다. ‘똑바로 살아라’는 감독 스파이크 리의 스타일이 확고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소위 작품성이 좋다는 평가가 받는 전형적인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밀러는 그런 전형적인 영화는 소위 ‘기교’가 발달한 영화라고 한다. (밀러는 'craft'라고 주장했지만, 편의상 '기교'로 해석했다.) 대표적인 영화로 ‘똑바로 살아라’처럼 다소 논쟁적인 주제(동성애)를 다루고 있음에도 높은 작품성과 인정을 받은 ‘브로크백 마운틴’이 있다. 이 영화의 경우, 동성애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닌 이들도 고양된 휴머니즘으로 합의를 볼 수 있도록 기교를 통해 객관성과 중립성을 유지하고 있다. 멋진 자연경관과 아름다운 음악 등을 통해 어떤 이야기에도 관객들이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돕는다. 이로써 인간이라면 이입할 수 있는 감정을 자연스레 자극해 관객들의 합의를 유도한다.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는 앞서 설명했듯이 이런 기교 있는 영화와는 완전히 상반된 영화이다. 영화에서 감독의 낯설고 투박한 스타일이 잘 느껴진다. 오히려 어떤 인물이나 상황을 아름답게 꾸며내는 법이 없다.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고 인종대립이라는 논쟁적인 소재도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밀러는 영화속 기교를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하나의 편향된 믿음'라고 평가했으며 이를 통해 신중히 절제하며 주제에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또 다른 밀실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밀러의 주장에서 봤을 때, ‘똑바로 살아라’는 비전형적인 연출과 낯선 전개방식으로 높은 평가와 많은 공감을 받기는 어렵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감독만의 메시지를 강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범적이고 매력적인 인물의 설정이나 서사의 개연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감독의 스타일로 주제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스타일이 만들어낸 혼란스러움에서 관객은 작품성 너머 감독의 진짜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

이 영화는 감독의 스타일이 묻어나는 연출뿐만 아니라 독특한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클리셰적인 내러티브가 적용되지 않았다. MULVEY가 정리한 197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서사 구조에서는 남근주의적 시선이 존재한다. 히치콕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자면 남성은 대부분 관음증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여성은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에 집착한다. 그리고 남성이 여성을 구원하거나 처벌하는 이야기 구조가 지배적이었다. 이는 곧 남근주의적 시선의 영화 구조가 만연했음을 의미한다. 남근주의적 시선이란 남녀의 분류에서 더 나아가 지배 계층이 특정 계층에 대한 이미지를 생산하고 그들을 해당 이미지에 가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똑바로 살아라’는 남근주의적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영화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해당 영화의 인물들이 특정 스테레오 타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다. 게으른 흑인과 비속어를 자주 쓰는 흑인 여성등 고정관념이 반영된 캐릭터 역시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특정 인물을 클로즈업해서 어떤 인물과 동일시를 의도적으로 유도하지 않는다. 동시에 뚜렷하게 선과 악을 상징하는 인물도 없고, 특별히 모범적인 인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선과 악의 대립이나 영웅 서사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인종과 무관하게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을 일삼는 인물들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흑인을 혐오하는 화가 많은 피자가게 아들, 노인에게 험한 말을 퍼붓는 젊은 흑인 패거리들, 불성실한 피자 배달부 흑인, 유난히 백인에게 적대적인 흑인, 그런 흑인 동네에서 25년간 장사를 해온 백인 남자, 굉장히 온화해 보이지만 한국인의 가게에서는 인종차별을 하는 노인. 이처럼 특별히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있는 캐릭터가 없다. 모든 캐릭터의 부정적인 면모를 과감하게 드러내고, 이것이 곧 영화의 주 플롯이 된다.


이처럼 쉽게 이입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 보니 영화가 절정에 이르고 폭동이 발생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폭동에 이르기까지의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감독은 인물 간의 대립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너무 더워서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브루클린’이라는 설정을 강조한다. 이런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오는 흑인들의 분노에 몰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놀라운 속도로 번져가는 흑인들의 분노에 우리는 그동안 흑인이 받아온 억압과 혹독한 차별의 시간을 연상해볼 수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백인 경찰이 저지른 살인으로 인한 분노는 순식간에 다른 백인에게 옮겨간다. 인종을 분리하고, 서로를 끊임없이 배척하고 증오하며 살아온 사회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백인과 흑인의 이분법적이고 대립적인 관계와 깊은 갈등의 골을 단번에 느낄 수 있다. 미국 사회 내 인종 간의 대립과 갈등이 굉장히 위태로운 경지까지 왔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영화는 오프닝 내내 반복해서 춤을 추는 흑인 여성을 보여주다가 끝나는 실험적인 인트로로 시작을 알린다. 오프닝 내내 “Fight the power”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힙합 베이스 음악이 흘러나오고, 한 흑인 여자가 격렬하게 춤을 춘다. 춤을 추고 있다고 단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렬하게 몸을 사용하며 마치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스템에 따르면 음악은 관객들의 정치적 관점의 확립에 영향을 미치고, 관중의 문화적 위치 결정에 기여한다. 따라서 어떤 음악적 코드를 사용하는가에 따라 영화의 분위기나 메시지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영화는 ‘Fight the power’라는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라디오 힘과 피자가게 주인 쌀이 갈등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인 스피커에서도 해당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폭동 후 불에 타고 있는 라디오 힘의 라디오에서 여전히 이 노래가 나온다. 흑인 음악으로 대표되는 힙합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적극적으로 흑인들의 언어와 음악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 노래에서 반복되는 가사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권력에 저항하라’라는 말은 억압받는 집단이 지배계층에게 외치는 말처럼 들린다. 단순하고도 반복적인 가사말의 배치는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환기한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흑인들은 낮은 교육 수준을 보이며 논리적으로 어떤 의견이나 메시지를 전달하기엔 부족한 인물들이다. 모범적인 인물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신 감독은 라디오라는 장치를 통해 해당 주제를 전달하고 있다. 라디오를 들고 있는 라힘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장면을 통해 그의 교육 수준을 유추해볼 수 있다. 카메라는 라힘을 비스듬한 앵글로 잡고 있다. 굉장히 위협적이고 강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인물 내에 잠재된 불안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런 라힘에게 라디오는 자신의 목소리이다. 라디오를 두고 라디오 힘과 쌀의 대화도 인상적이다. 노래를 끄라는 쌀의 외침에 라디오 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is is my music!” 이건 마치 그동안 미국 사회 내 흑인들이 끊임없이 요구했던 자유와 존중을 향한 갈망을 의미하는 듯하다. 라디오를 쌀이 부술 때 카메라는 해당 공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다양한 인종의 얼굴을 바스트샷으로 집어낸다. 라디오가 부서진 후, 라힘이 처음으로 내뱉는 말은 “내 라디오!”가 아니라 “내 음악!” 이다. 라힘은 라디오가 부서진 것보다 그의 음악, 그의 목소리가 멈춰진 것에 분노한 것이다.  


흑인들의 목소리에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을까? 사소한 계기에도 폭발하듯이 불어나는 그들의 분노를 보며 관객들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똑바로 살아라’라는 이 영화는 다소 인과성이 약한 전개, 낯선 촬영 및 편집 기법 등 감독의 스타일이 확고하게 묻어나는 작품이다. 감독은 기교 대신 자신만의 스타일로 미국 내 인종 갈등의 참상을 여실 없이 드러내고 있다. 라디오 힘의 손에 껴진 반지를 떠올려보자. 왼쪽 손은 HATE, 오른쪽 손은 LOVE가 있다. Do the right thing. 이제는 서로를 love해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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