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은 유독 길고, 지루했다. 매미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한낮의 열기,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뜨거운 햇살. 친구들은 모두 가족 여행을 떠나거나 학원에 가기 바빴고, 나는 홀로 텅 빈 방에 남겨졌다.
창문 밖을 내다보면 길거리엔 그림자마저 축 늘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 무료한 오후, 나는 방바닥에 대자로 뻗어 천장만 바라보다가 문득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라도 가야만 했다. 어디라도.
발걸음이 닿은 곳은 푹푹 찌는 여름의 열기를 피해 잠시 몸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
낡은 만화방이었다. 에어컨 바람에 퀴퀴한 종이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시원한 공기가 피부에 닿자 비로소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익숙한 듯이 만화책이 빽빽이 들어찬 서가 사이를 거닐었다.
수많은 이야기들, 수많은 작가들의 꿈이 얇은 종이 속에 박제되어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구석에 먼지가 쌓인 채 놓여있던 낡고 해진 만화책이었다.
표지에 그려진 낡고 해진 소녀의 모습. 나는 홀린 듯 그 책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이름이 하제였다.
나는 만화책을 펼쳐 들고 구석에 앉았다. 이야기는 모든 이에게 잊혀 힘을 잃어가는 한 단어의 이야기였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점점 흐릿해지는 소녀, 하제.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는 모습은 어린
나의 눈에는 너무나도 가슴 아팠다. 그러나 이야기는 끝내 완결되지 못한 채 멈춰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 텅 빈 여백에 '계속...'이라는 글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만화책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그곳에는 흰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이 책 좀 빌려주세요."
내 말에 할아버지는 안경 너머로 책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우리 책방 책이 아닌데. 어디서 가져온 거니?"
할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당황했다. 분명히 이 책방에서 발견했는데.
"그럼... 혹시 팔고 계신 건가요?"
내가 조심스레 묻자, 할아버지는 헛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냥 가져가렴. 언젠가 누군가 두고 간 모양인데, 주인 없는 책을 팔 순 없지."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그 만화책을 들고 서점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책상에 앉아 만화책을 펼쳤다. '계속...'이라는 글자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이대로 이 이야기가 멈춰버린다는 게, 어쩐지 너무 슬프게 느껴졌다. 나는 만화 속 소녀 '하제'에게
감정 이입이 되었다.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는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직접 그녀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거야.
나는 낡은 연필을 쥐었다. 하제를 처음 알게 된 날부터 지금까지, 나의 모든 상상력이 이 한 자루의 연필 끝에 담겨 있었다. 나는 하제를 떠올렸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일'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