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위한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그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언젠가 내가 쓴 이 모든 글이 현실이 되어 그녀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
나는 하제라는 가명을 쓰는 순간, 언젠가 현실의 그녀를 만날 날이 오면 '하제'라고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의 이름이 '내일'이라는 뜻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우리 모두에게 '내일'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하제'를 기억하며, 나 자신을 구원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나는 '하제'라는 이름을 품은 채 어른이 되었다.
"후회하고 있나, 이안?"
키보드 위에 얹혀 있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며칠째 그대로인 웹툰 작업 창을 내려다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는데, 뭐. 후회? 후회는 이미 수도 없이 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아니, 셀 수 없을 만큼.
왜 만화가를 꿈꿨을까..
왜 이 지독한 현실에 발을 디뎠을까. 내 속도 모르고 창문 밖 선풍기는 여전히 힘없이 원고를 팔랑거리고
있었다. 숨 막히는 여름 공기 속에서, 그건 억지로 밀어 넣는 바람처럼 느껴졌다. 텅 빈 작업 창만큼이나
내 마음도 텅 비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제'라는 이름은 이제 더 이상 내일의 희망이 아니었다. '어릴 적에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희미해진 기억. 만화책이 어디에 있는지, 작가는 누구였는지,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낡은 유품처럼, 의미를 잃은 채 내 이름에만 남아 있는 단어였다. 마치 '내일'이라는 뜻을 잃어버리고
이름만 남은 그녀처럼. 의미를 잃어버린 이안과 하제, 그리고 그 가명을 쓰는 나. 우리 모두에게는 더 이상
'내일'이 없는 것만 같았다.
며칠째 마감 기한을 넘긴 웹툰 작업은 돌덩이처럼 무겁게 짓눌렸다. 책상에 덩그러니 놓인 펜은 낯선 물건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쥐어봐도 손가락 끝은 감각이 없었다. 텅 빈 작업 창을 응시했다. 무한한 백지. 그 백지는 내가 잃어버린 '내일'의 크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작가 '하제'가 뭘 하고 싶은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텅 빈 캔버스가 내 마음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내일'을 향한 나의 마음은 그렇게 텅 비어 있었다.
창밖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흐렸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내 마음 때문인지 알 수 없는 흐릿한 하늘.
모든 것이 똑같았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다가올 내일마저도 똑같을 것만 같았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일...? 하제? 참, 웃긴 일이었다. 내가 그토록 동경했던
단어는 이제 나를 옥죄는 감옥이 되어버렸다. 어릴 적에는 '내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올랐는데. 마치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탐험가처럼, 매일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았는데. 이젠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사전적 정의만 남은 단어일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낡은 노트북을 덮었다. 뚜껑 닫히는 소리가 마치 내 꿈이 닫히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더 이상 나 자신을 채찍질할 힘도 없었다. 그냥, 이대로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무작정 집을 나섰다. 며칠 만에 밖으로 나온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마치 좀비 같았다. 헝클어진 머리, 퀭한 눈, 늘어진 티셔츠. 이게 내가 그토록 염원하던 미래였던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열기가 나를 덮쳤다. 끈적한 공기가 폐까지 파고드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뜨겁게 달궈진 시멘트 건물들은 위압적으로 서 있었다.
나는 축 늘어진 그림자를 끌고 목적 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골목을 지나고, 낡은 상점가를 지났다.
매미 소리는 이미 귀를 뚫고 들어와 머릿속을 웅웅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내 속도 모르는 세상이 억지로
밀어 넣는 소음 같았다. 그나마 숨을 쉴 수 있던 작업실이 감옥처럼 느껴졌던 것처럼, 이제 도시 전체가
거대한 감옥처럼 느껴졌다. 몸은 땀으로 끈적거렸지만, 왠지 모르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후회와 절망이 뒤섞인 감정은 너무 뜨거워져서 오히려 무감각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문득 멈춰 섰다. 무의식적으로 발을 옮기던 내가 낯선 골목 어귀에서 멈춰 섰다. 무언가 나를 이끄는 듯한 알 수 없는 기운. 끈적한 여름 공기 속에서 나를 홀리는 듯한, 부드럽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홀린 듯 그 바람을 따라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낯선 길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골목을 꺾자, 저 멀리 작은 간판이 보였다. 낡은 만화방이 있던 자리. 어릴 적, 내가 처음 '하제'를 만났던 그곳. 지금은 서점으로 바뀌어 묘하게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맞아. 이런 곳에 만화방은 없어지고 서점이 생겼네. 더운데, 더위나 식히고 다시 들어갈까?"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뭐, 요즘 어떤 책이 잘 팔리나도 조사할 겸. 에어컨 바람에 퀴퀴한 종이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옛 만화방은 빼곡한 책꽂이와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만화 더미,
그리고 눅눅하고 퀴퀴한 종이 냄새로 가득한 비밀 아지트였다. 그곳은 어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나만의 왕국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서점은 달랐다. 깔끔하게 정돈된 서가와
가지런히 놓인 신간들은 왠지 모르게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그래도 퀴퀴한 종이 냄새만은 남아
있었다. 익숙한 냄새. 그 향기는 마치 잊고 지냈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슬펐다. 예전에는 이 냄새만 맡아도 가슴이 설렜는데. 이제는 그저 아련한 추억의 조각일 뿐이었다.
책장을 천천히 거닐었다. 베스트셀러 코너를 지나고, 자기 계발서 코너를 훑었다. 모두가 말하는 성공의 길.
나는 한때 이 모든 책들을 읽고 내일을 꿈꿨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수많은 이야기들, 수많은 작가들의 꿈. 그들의 '내일'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책 속에 박제되어 있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책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익숙한 그림체였다. 표지에 그려진 낡고 해진 소녀의 모습.
"하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