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by HaJae

나한테 이야기하는 그녀는 진짜 하제일까? 이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를 그려줘.' 그건 내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그녀의 목소리였을까. 낡은 스케치북이 미묘한 빛을

내뿜는 것 같았다. 그 빛이 내 눈을 멀게 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홀린 듯이, 무언가에 이끌려 낡은 스케치북을 들고 다시 밖을 나갔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서점을 찾았다. 낮에 샀던 '완결' 만화책이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정말 '하제'는 만화책 속에서 행복을 찾았을까. 혹은, 여전히 슬픈 결말 속에 갇혀 있을까.


서점 문은 이미 살짝 열려 있었다. 그 틈새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그 빛을 따라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종이 냄새가 나를 반겼다. 나는 주저 없이 낮에 만화책을 발견했던 구석으로

향했다. 그 자리에 서서, 나는 만화책을 펼쳐 들었다. '완결'이라고 쓰여 있던 마지막 페이지. 나는 그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 순간이었다. 책의 페이지가 펄럭이더니, 낮에 봤던 '완결' 글자 대신에 텅 빈 여백에 새로운 그림 한 컷이 나타났다. 그림에는 하제가 환하게 웃으며, 내가 서 있는 서점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림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안, 드디어 찾았다!'

그림이 나타나자마자,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내 손에 들린 책은 더 이상 단순한 만화책이 아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책을 덮고, 서점 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리자, 한 소녀가 들어왔다.

낮에 만났던, 나와 똑같은 책을 들고 있던 그 소녀보단 조금 키가 작은? 소녀였다. 동생인가?

그때였다. 내 눈앞에 서 있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역시... 너지? 이안?"


소녀의 눈동자는 마치 내가 그렸던 '하제'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말했다.


"넌 대체 누구야?"


"누구긴 너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소녀의 대답에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만든 캐릭터가,

내 눈앞에 서 있다니. 나는 그 소녀가 마치 내가 만든 환각처럼 느껴졌다.


"농담하지 마.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너는 내 구원자잖아."


소녀의 말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혼란,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정말... 하제인 거야?"


소녀는 내 질문에 대답 대신, 내 손을 잡았다. 소녀의 손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나는 멍하니 소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소녀는 나를 이끌고 골목을 따라 걸었다.


"저것 좀 봐, 이안."


소녀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시멘트 바닥을 뚫고 피어난 노란 민들레. 나는 한동안 그 민들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늘 지나치던 곳인데, 저런 것이 있었던가.


"내일은 이런 거야. 모두가 잊고 지내지만, 분명히 존재하지."


소녀의 목소리는 마치 잃어버린 노래 같았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나를 이끌고, 내가 잃어버렸던 '내일'의 흔적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녀가 보여주는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과 너무나도 달랐다.

나는 소녀를 따라가며, 서서히 잊고 지냈던 감정들을 되찾기 시작했다.

나의 '하제'가, 나에게 돌아온 것이었다.


“이안, 그 스케치북 아직 가지고 있구나?”


폐허가 된 낡은 빈 공터, 하제가 가리킨 손을 따라 내려다보니 내 손에 들린 낡은 스케치북이 보였다.

나는 언제부터 이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하제는 그런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어릴 때 너랑 같이 그림 그리던 거.”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제야 내가 왜 이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릴 적 하제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펜을 쥐었던 그 시간,

그 세계가 바로 이 스케치북 안에 담겨 있었다.


“줘봐, 그 스케치북. 우리 돌아가자. 다시 되돌릴 수 있어, 이안. 알잖아, 너가 다시 나를 부른 거.”


하제의 말은 마치 내가 잃어버렸던 기억의 퍼즐 조각을 맞춰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혼란스러웠다.

'돌아간다'니, '다시 부른다'니, 무슨 말이지? 내가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멍하니 물었지만, 하제는 대답 대신 나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만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내가 어릴 적 보았던 만화 속 하제의 모습처럼 희미해 보였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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