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제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돌아간다'니, '다시 되돌린다'니.
무슨 말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내 손에 들린 스케치북은 내가 아는 낡은 종이 묶음이 아니었다.
하제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묵묵히 스케치북을 펼쳤다.
"이안, 펜을 놓지 않으면 '내일'은 사라지지 않아."
그녀의 목소리는 어린 시절의 나와 내가 그린 하제가 대화하던 목소리와 똑같았다.
낡은 스케치북이 펼쳐지자, 그 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희미한 빛은 점점 더 강렬해지며,
내 눈을 가득 채웠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귓가에는 매미 소리가 웅웅 울렸다. 그리고 눅눅하고 퀴퀴한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끈적한 여름 공기 속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냄새.
나는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내가 알고 있던 서점이 아니었다. 빼곡한 책꽂이와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만화책 더미. 낡은 선풍기만이 힘없이 돌아가고 있는 풍경. 나는 여기가 어릴 적 내가 처음 '하제'를 만났던 낡은 만화방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여... 여기가..."
내 목소리가 떨렸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생생했다. 하제는 그런 나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말했잖아. '내일'을 되찾으러 가자고."
하제는 내 손을 잡은 채로 만화방 안을 걷기 시작했다. 낡은 책장 사이를 지나 구석으로 향하자, 그곳에는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땀으로 축축한 소년의 뒷모습. 그는 낡은 만화책을 펼쳐 들고 숨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그건... 어릴 적의 나였다.
나는 멍하니 어린 나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똑같았다. 심지어 그때의 내가 느끼던 숨 막히는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하제는 내 질문에 대답 대신, 어린 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린 나는 고개를 들었고, 그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어린 나는 나를 보지 못했다. 그저, 내 뒤에 서 있는 하제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바로 너의 '내일'이야. 너는 '내일'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라진 게 아니야.
그저 잠시 숨어버린 것뿐이지."
하제는 어린 나와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 낡은 스케치북을 펼쳐 놓았다. 내가 들고 있던 스케치북이었다.
어린 나는 스케치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주저 없이 낡은 연필을 쥐고 스케치북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린 나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잊고 지냈던 그 뜨거운 열정. 나는 한때 이렇게 간절하게
'내일'을 꿈꿨었다.
"그럼, 이제 뭐 하면 돼?"
나는 하제에게 물었다. 하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야 해. 너의 '내일'을 잃어버리게 만든 그 순간을.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자, 다시금 주변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눈앞의 풍경이 흔들리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둡고 텅 빈 방에 서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낡은 키보드와 며칠째 그대로인 웹툰 작업 창이 띄워진 노트북이 보였다. 내 마음속에 있는 내 방이었다.
그리고 문득,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이안아, 네 만화에는 '내일'이 없어."
그건 유진이 형의 목소리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주변을 더듬었다. 텅 빈 작업 창을 응시하며 절망했던
그 순간, 내가 '내일'을 잃어버렸다고 느꼈던 그 순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제...?!"
나는 그녀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저 낡은 스케치북이 바닥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내일'이 사라진 내 마음처럼.
“자, 이제 다시 채워 넣을 시간이야.”
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하제와 똑같은 모습의 소녀가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맑고 투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낡은 연필이 들려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존재는 내가 잃어버린 '내일'의 조각들을 모두 모아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자, 작가님.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됐나요?”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과연 나는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정말, 나의 '내일'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고민 끝에 결심했다.
"찾겠어. 내가 잃어버린 '내일'의 조각들을."
하제의 질문은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나는 낡은 스케치북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잃어버린 '내일'의 조각.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더 이상 이 절망 속에 머무를 수 없었다.
나는 결심을 굳힌 목소리로 말했다.
"뭘 하면 되지? 방법을 알려줘, 하제."
나의 대답에 하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낡은 연필로 바닥에 놓인 스케치북의 텅 빈 여백을 가리켰다.
"후회는 지금의 너를 만든 조각이야, 이안.
하지만 너를 잃어버리게 만든 조각은 되돌려 놓아야 해."
하제가 말했다.
"이 스케치북은 네가 잃어버린 시간으로 향하는 나침반이야. 이 스케치북을 완성해야 우리의 세계도,
너의 '내일'도 완성될 수 있어."
나는 낡은 스케치북을 주워 들었다. 오래된 종이의 질감이 손끝으로 생생하게 전해졌다.
"규칙은 간단해. 명심해."
하제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설명했다.
"이 스케치북을 절대 놓치지 마. 이건 우리의 유일한 증거이자, 과거와 현재를 잇는 통로야. 네가 진정한
'내일'을 되찾을 때까지, 이 스케치북은 네 존재를 증명할 거야.
여기에 너의 잃어버린 '내일의 조각'을 다시 그려 넣어야 해."
"시간의 순서대로 돌아가야 해. 너의 상실의 순간은 여러 개일 수 있어.
하지만 우리는 네가 처음으로 '하제'가 되기를 멈추고 '이안'이라는 절망적인 어른에
갇히기 시작한 가장 초기의 순간부터 찾아야 해."
"그 순간에 잃어버린 것을 원래의 자리에 되돌려 놔야 해. 너를 잃어버리게 한 이유를 찾아,
과거의 너를 구원해야 해. 과거의 네가 '내일'에 대한 믿음을 되찾으면, 현재의 너도 구원받을 수 있어."
"잃어버린 것... 나 자신이라는 뜻이야?"
"응. 너를 잃어버리게 한 이유. 그건 '내일'에 대한 믿음, 그리고 펜을 놓지 않겠다는 너의 약속이야."
하제는 스케치북을 내 손에 단단히 쥐여주었다. 낡은 종이의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제 시작이야, 작가님. 첫 번째 '상실의 순간'으로 가자."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 안의 모든 빛이 스케치북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귓가에는 매미 소리가 힘차게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