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시작이야, 이안.”
하제가 미소 지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 순간 시간은 다시 어린 내가 만화책을 발견하기 직전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내가 현재의 서점에서 사 온 만화책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어린 내가 발로 만화책을
걷어차고 발견하게 될 책은, 내가 어릴 적 처음 만화방에서 주워 온 그 낡고 해진 만화책이었다.
내가 현재 들고 있는 이 책은 겉표지만 '완결'이라 쓰여 있을 뿐, 내용물은 완전히 같았다.
"너는 이 책을 놓아두어야 해. 네가 처음 책을 주웠던 그 자리, 그 시간 속에."
하제가 속삭였다.
"그렇게 해야만 어린 너는 운명이 아닌 순수한 만남으로서 나를 기억할 수 있어.
미지의 존재가 던져준 짐이 아니라, 네가 선택한 '내일'이라고."
나는 하제의 설명을 들으며 떨리는 손으로 만화책을 쥐었다. 내가 이 책을 놓는 순간, 나의 모든 창작과
고통의 시작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나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섬뜩한 진실.
"저기, 저 자리."
하제가 낡은 책상 아래 구석을 가리켰다.
나는 어린 내가 땀에 젖은 채 턱을 괴고 앉아 있는 곳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과거의 공간은 현재의 나를 인식하지 못했다. 어린 나는 여전히 멍하니 만화책 더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몸을 숙였다. 만화책 더미와 낡은 나무 책상 사이에 공간이 있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 내가 현재 서점에서 사 온 '하제' 완결판 만화책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책은 먼지 쌓인 틈새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완벽하게, 어린 내가 발을 뻗으면 툭 걸릴 만한 위치에 멈춰 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 순간, 어린 내가 몸을 틀며 발을 움직였다. 툭! 발끝에 만화책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어린 나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책을 주워 들었다.
"이봐, 너."
어린 내가 책의 표지를 바라보며 완전히 홀리기 직전, 나는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하제가 어린 나를 설득하라고 했지. 어린 내가 이 운명에 무게를 느끼지 않도록.
어린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를 쳐다보는 어린 나의 눈은 당황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눈은 내가 잃어버린, 순수한 내일을 담고 있었다.
"이봐, 꼬마."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 책, 네가 찾은 게 아니야."
어린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아저씨는 누구세요? 저는... 분명히 여기서 찾았는데."
"아니. 넌 그 책을 이미 알고 있었어."
나는 미소 지었다.
"아니, 네가 그 책을 만들어야 할 사람이니까.
그 책은 네가 펜을 놓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한, 사라지지 않아."
어린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책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연필이 쥐어져 있었다.
그 연필은 내가 잃어버렸던 내일의 조각이었다.
"네가 그걸 알아야 해. 하제는... 네가 만든 거야. 그리고 네가 계속 만들어가야 해."
나는 말을 끝내고 하제를 바라보았다. 하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임무가 성공했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어린 나는 여전히 만화책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어린 나에게서 낯선 기시감과 미스터리가 뒤섞인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저, 혹시... 아저씨가 이 만화책 만든 사람이에요?"
어린 나의 엉뚱한 질문에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미래의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내가 하제에게
속해 있는 존재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내 손에 들린 낡은
스케치북의 표지를 조용히 보여주었다.
어린 나는 스케치북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다시 자기가 주운 만화책 표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지고 있었다. 미래의 이안이 과거에 만화책을 두고 오고, 어린 이안이 그 책을 발견하고, 미래의 이안이 나타나 이 모든 것이 '네가 만들 운명'이라고 확인해 주는 기묘한 순환.
나는 옅게 미소 지었다. 첫 번째 상실의 조각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이제 만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단순한 발견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가야 할 운명이 될 것이다.
그 순간, 잊고 있던 어릴 적 기억의 파편 하나가 불꽃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그 아저씨.' 어린 나는 분명 그날, 만화책을 발견하기 직전에 구석에서 그림자처럼 희미한 어떤 사람을 보았던 것 같았다. 낡은 만화책이 툭 튀어나왔을 때, 어린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만화방 할아버지가 "주인 없는 책"이라고 했을 때, 사실은 '그 아저씨'가 두고 간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억은 여름날의 끈적한 꿈처럼 흐릿해졌고, 홀로 외로워 상상한 것이라 치부해 버렸었다.
하지만 지금, 바로 내가 '그 아저씨'였다.
내가 과거의 나에게 나를 만나게 해 준 주체였다는 사실. 모든 시작은 나였고, 나의 절망은 내가 과거에 심어 놓은 희망의 짐이었다는 깨달음이 온몸의 피를 차갑게 만들었다. 이것이 하제가 말한 '잃어버린 내일의 조각'이었다. 자신의 창작의 시작이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는 부담감. 이제 이안은 그 부담감을 덜어주고,
어린 자신에게 진정한 내일을 선물해야 했다.
"하지만, 이안."
등 뒤에서 하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린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하제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옅은 미소는 사라지고, 대신 진지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첫 번째 상실의 조각은 이제 제자리를 찾았어.
만화책과의 만남이 순수한 동경이 되었다는 건 성공이야.
하지만 '내일의 조각'이 완벽하게 해소된 건 아니야."
나는 혼란스러웠다.
"완벽하게 해소된 게 아니라니? 내가 스스로의 시작을 알게 되었는데?"
"네가 펜을 놓은 건 한 번의 절망 때문이 아니었어."
하제가 천천히 말했다.
"너의 내일을 앗아간 상실의 순간들은 여러 겹으로 쌓여 있지.
네가 잊고 지낸 다른 순간들. 그것들이 너의 펜을 무겁게 만들었어."
하제는 만화방 문을 응시했다. 어린 나는 여전히 만화책 표지를 보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상실의 순간들을 찾아내야 해.
네가 내일을 포기하게 만든 진짜 이유들. 그리고 그 실마리는..."
하제는 나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 어린 너에게 있어. 네가 그 책을 발견한 이후의 삶, 그 속에 다른 조각들이 숨어 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해?"
"간단해. 너는 어린 너의 수호자가 되어야 해.
네가 잊었던 기억 속의 '그 아저씨'처럼, 때때로 어린 너의 삶에 다시 나타나야 해.
어린 너는 이미 너를 '하제'와 관련된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어. 이 기시감을 이용해야 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계속... 과거의 나를 지켜보고, 개입하라는 거야?"
"아니, 설득해야 해. 절망이 침범하기 전에 희망을 재확인시켜주는 거야."
하제는 스케치북을 가리켰다.
"이 스케치북이 나침반 역할을 해줄 거야. 다음 상실의 조각이 나타날 때, 빛이 너를 그 시간,
그 장소로 데려다줄 거야. 준비해, 이안. 아직 너의 과거 여정은 끝나지 않았어."
하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낡은 스케치북이 다시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