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by HaJae

눈앞을 가르던 빛이 순식간에 꺼졌다. 강제로 당기던 시간이 탁, 손을 놓은 느낌이었다.


숨이 가쁘게 들이켰다 나갔다. 나는 만화방 한편을 둘러보았다. 모든 게 처음처럼,

아니 어쩌면 아주 옛날처럼 제자리였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여름 공기, 고막을 긁는 매미 소리,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 그리고 낡은 책상이 줄지어 있는 그 구석 자리까지.


책상 아래, 어린 내가 있었다.

방금 내가 던져준 하제 책을 주워 들고, 두 손으로 꼭 끌어안고 있었다. 아직 책은 펼치지도 못한 채,

표지와 나를 번갈아 보며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놀람과 기대가 반씩 섞인 눈빛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 눈빛을 한 번에 이해해 버렸다.

나도 저 얼굴로, 누군가를, 어떤 이야기를 평생 기다려 왔으니까.


그림자 속에 서 있던 하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만났어, 이안.”


속삭이는 목소리가 찢어진 시간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제 네가 할 일은 ‘운명’을 지우고, ‘내일’을 심는 거야.”


어린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아저씨가 이 만화 만든 사람이에요?”


그 목소리에는 내가 한때 화면 너머 작가에게 품었던 감정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동경, 부러움, 말도 안 되는 존경 같은 것들. 나는 단숨에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그렇다고 해 버리면, 솔직히 모든 게 편해질지도 모른다.


“그래, 그 작가가 나라서 온 거야”라고 말해 버리면,

저 아이는 바로 이해하고 나를 따라올 것이다. 책임도 같이 던져 버릴 수 있겠지.

하지만, 하제가 전에 했던 말이 귓가를 세게 울렸다.


네 절망의 무게를, 어린 너에게 짐 지우지 마.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고, 억지로 웃음을 만들어 붙였다.


“아니.”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건 내가 만든 책은 아니야.”


어린 나는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럼요? 아저씨는… 이걸 왜 저한테 준 거예요?”


나는 어린 내가 들고 있는 책을 가리켰다.


“이건 너 이야기거든.”


말을 하면서도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너의 ‘내일’에 관한 이야기. 책은 이미 완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책을 진짜로 완성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어. 어떻게 끝날지는... 네가 앞으로 만들어 갈 세상에 달린 거야.”


이 말이 얼마나 이해될지, 나도 잘 몰랐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그 말밖에 해 줄 수 없었다.

‘너는 정해진 운명 따라가는 조연이 아니고, 네가 직접 써야 하는 주인공이다.’

그냥 그런 느낌이라도, 조금은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나는 여전히 정확한 뜻을 다 알아듣지는 못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그 눈빛만큼은 분명해졌다.

작게, 아주 작게 웃더니 곧바로 책을 펼쳐 들었다. 방금 내가 한 말을 이해는 했을까.

그 순간, 만화방의 소음이 서서히 멀어졌다.

아이의 시선이 페이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나는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으로 나 자신을 독자로서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성공했어, 이안.”


어깨 옆에서 하제가 안도하듯 말했다.


“너는 ‘절망의 무게’ 대신 ‘순수한 가능성’을 건넸어. 이제 저 아이의 ‘내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거야.

저 어린 너를 계속 따라가.”


어린 나는 만화책을 끌어안다시피 들고, 만화방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마치 오랫동안 찾던 보물을 드디어 손에 넣은 사람처럼.

주변의 왁자지껄한 소리도, TV에서 나오던 예능 소리도,

계산대에서 찍히는 삑 소리도 더 이상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어린 나는 온전히 책 속 하제와 대화하고 있었다. 지금의 내가 잃어버린, 그 황홀한 집중력으로.


“저 아이는 곧 집으로 갈 거야.”


하제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나를 그리기 시작하겠지. 그다음 상실의 조각은, 네가 세상의 벽과 처음으로 부딪힌 자리야.

‘세상에 꺼낼 용기’를 잃어버린 순간.”


우리는 만화방을 먼저 빠져나왔다. 문 위의 종이 찌그러진 소리를 내며 울렸다. 잠시 후, 땀에 젖은 티셔츠를 붙잡고 헐레벌떡 뛰어나오는 어린 이안을 뒤따라 골목길을 걸었다.


내가 평생 밟고 다니던 길인데도, 이상하게 모든 게 더 선명해 보였다.

포장마차의 붉은 비닐, 골목 벽에 붙어 갈라진 전단지, 낮은 담장 위로 넘치는 능소화, 전봇대에 기대 선

선풍기 소리. 마치 그동안 흑백으로만 보던 사진을, 갑자기 컬러로 바꿔 본 느낌이었다.


집 앞에 도착한 어린 나는 망설임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 곧바로 뒤뜰로 향했다.

벽돌 담장 아래, 잡초가 허벅지 높이까지 자라 있고, 그 사이에 낡은 플라스틱 테이블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얼룩이 잔뜩 묻어 있었고, 햇빛에 바랜 색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어린 나는 하제 만화책을 옆에 툭 내려놓고, 낡은 스케치북을 펼쳤다.

연필을 쥔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 만화방에서 보았던 동경 같은 건 이미 넘어섰다.

지금 그의 눈에는, 그려지지 않은 선들을 붙잡겠다는 집념 같은 게 타오르고 있었다.


“보이지?”


하제가 내 옆에서 물었다.


“저 아이는 지금 네가 잃어버린 ‘내일’을 그리고 있어. 네가 포기해 버린 그 시간들을 대신 채우고 있는 거지.

하지만 이 순수한 열정은 곧, 세상의 차가운 벽과 마주치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네가 펜을 놓게 된 두 번째 이유. ‘세상에 꺼낼 용기’의 상실.”


하제의 말이 끝나자, 공기가 또 한 번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빛이 번쩍이는 식이 아니라, 색감 자체가 조금 다른 쪽으로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여름 특유의 축축한 냄새 위로, 종이 냄새와 흑연이 긁히는 냄새가 더 진하게 겹쳤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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