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이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초점을 찾았을 때, 나는 낡은 만화방 입구에 서 있었다. 끈적한 여름 공기,
귓가를 뚫고 들어오는 매미 소리, 그리고 눅눅하고 퀴퀴한 종이 냄새. 모든 것이 어릴 적의 기억과 똑같았다. 하제는 내 옆에 서서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기가 첫 번째 상실의 순간이야. 너의 '내일'이 처음으로 태어났고,
동시에 언젠가 사라질 씨앗이 뿌려진 곳."
나는 멍하니 만화방 안을 바라보았다. 낡은 선풍기가 힘없이 돌아가고 있는 구석. 그곳에는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땀으로 축축한 소년의 뒷모습. 그는 턱을 괴고 멍하니 낡은 만화책 더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릴 적의 나.
그때의 나는 외동으로 늘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여름 방학 동안 친구들은 모두 시골로 떠났고, 텅 빈 동네에서 상상력으로만 친구들을 만들며 외로움을 달래던 날이었다. 어린 나는 구석에 앉아 땀에 젖은 채,
세상의 모든 재미가 사라진 것처럼 시무룩해 보였다.
"저기 봐, 이안."
하제가 속삭였다.
나는 어린 나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때, 어린 내가 앉아 있던 낡은 책상 아래 구석. 먼지가 잔뜩 쌓인 만화책 더미 사이로 빛바랜 책 한 권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그것은 내가 어릴 적 읽었던, 그리고 방금 전
현재의 서점에서 사 들고 온 그 '하제' 만화책이었다.
"봤지?"
하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저 책은 원래 저기에 없었어. 누군가가 저 시간, 저 장소에 놓아두었기 때문에 어린 너는 저 책을 발견했고, 그 때문에 '내일'을 꿈꾸기 시작했지."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라니? 누가 그걸...?"
그때, 어린 내가 무심코 발을 움직였다. 발끝에 만화책이 툭 걸렸다. 어린 나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책을 주워 들었다. 먼지를 털어내자 빛바랜 표지가 드러났다. 표지에는 낡고 해진 소녀의 모습, 하제가 있었다. 어린
나는 홀린 듯 그 책을 펼쳐 들고 숨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내가 만화방에
처음 왔을 때와 똑같았다.
"너였어."
나는 중얼거렸다. 등 뒤로 섬뜩한 소름이 돋았다.
"이 책을 여기에 갖다 놓은 건... 내가 되는 거야?"
하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손에 들린 낡은 스케치북을 톡톡 두드렸다.
"기억나? 어릴 적 서점 할아버지가 '이건 우리 책방 책이 아닌데'라고 했잖아. 주인 없는 책을 너는 가져왔고, 그게 너의 '내일'이 됐지. 지금 네 손에 있는 이 스케치북이 바로 그 증거야."
나는 깨달았다. 어렴풋이 미스터리 하게 남아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어린 내가 하제에게 빠져들게 된 결정적인 계기, 그 신비로운 시작은 미래의 내가 만든 과거의 간섭이었다. 나의 현재의 절망은
나의 과거의 희망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었다. 내가 잃어버린 '내일'의 조각은 바로 '내가 이미 하제를 만나게 해 준 존재'라는 이 사실 자체였다.
"이게 첫 번째 상실이야. 너는 이 책을 통해 '내일'을 얻었지만, 이 책의 기원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너의 '내일'은 운명적 숙제가 아닌 미지의 짐이 되었지.
어린 너는 그저 홀린 듯이 이 책을 쥐고 '내일'을 향한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어."
하제는 어린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만화책을 든 어린 나의 손에는 낡은 연필이 쥐어져 있었다.
만화 속 텅 빈 여백에 새로운 페이지를 더하려는 듯, 그의 눈빛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잃어버린 '내일'을 향한 용기였다.
"우리가 되돌려 놓아야 할 건, 네가 '펜을 놓지 않으면 돼'라는 약속을 부담이 아닌
순수한 동경으로 남기는 거야. 너를 절망시킨 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니까."
하제는 내 손에 들린 낡은 스케치북을 가리켰다.
"스케치북이 이 상황을 기록하고 있어. 이제 너의 '내일'을 다시 그려 넣을 시간이야.
'어른의 절망'이 어린 너의 '순수한 희망'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나는 낡은 스케치북을 펼쳤다. 어린 내가 만화책 속 하제에게 말을 걸고, 함께 '내일의 조각'을 모으는 상상의 내용이 흑백으로 펼쳐졌다. 그러나 곧이어, 만화방을 나서는 어린 나의 모습과 함께 페이지는 텅 비어 있었다.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할 일이야, 이안. 이제부터 어린 너를 설득해야 해."
나는 숨을 들이켰다. 이 기묘한 임무의 첫 단추. 나는 과연 절망에 찌든 현재의 시선으로,
희망에 가득 찬 과거의 나를 바꿀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