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HaJae

높은 태양 아래, 한 마리 새가 낮게 날았다.

그 새의 그림자는 길고 깊었다.

그 아래에 선 사람들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마치 그 어둠이 자신들을 삼켜버릴까 두려운 듯이.


나는 그 그림자를 올려다봤다.

이상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게 끝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편해질 것 같았다.


언젠가, 나도 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겠지.

나는 죽는 게 생각보다 멀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베개에서 고개를 드는 일조차 버거웠다.

천장을 보다가, 벽을 보다가, 창문을 보다가.

결국 다시 눈을 감았다.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윤슬, 밥 먹어야지.”


문 밖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늘 그렇듯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


“… 곧 갈게요.”


입으로만 대답했다.

몸은 여전히 이불속에 묻혀 있었다.

시계는 이미 지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학교에 가려면 지금 당장 나가야 하는데,

그 사실이 전혀 위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교실에 가면 뭐가 있을까.

문제집, 시험범위, 그리고 나를 외면하는 시선들.

어제, 시험지를 받았을 때 담임이 내 앞에 멈춰 섰다.

빨간 숫자, 47.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윤슬, 이게 뭐니? 요즘 왜 그래?”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짧게,


“네.”


그게 다였다.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자격조차 없다고 느꼈다.


점심시간, 혼자 앉아 밥을 먹었다.

예전엔 옆자리에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은, 빈 의자와 내 도시락뿐이었다.


화장실에서 들은 목소리들이 떠올랐다.


“윤슬, 요즘 좀 음침하지 않아?”

“같이 있으면 우리까지 음침해진다니까.”

“가까이 가지 말자.”


그 말들이 귓속에 맴돌았다.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진짜 이상했고, 우울했고,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존재일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다녀왔습니다.”


식탁에 마주 앉은 아빠가 반찬을 내 앞에 밀었다.


“요즘 무슨 일 있니?”


그 한마디에, 나는 젓가락을 멈췄다.

익숙한 대사였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구나?

아빠한테 말해봐. 같이 해결해 보자.”


그 말에 숨이 막혔다.

입안에서 단어가 걸려 나왔다.


“해결? 아빠는 몰라요. 아빠가 어떻게 해결을 해.”


“윤슬아..”


“제가 얼마나 힘든지,

학교가 얼마나 숨 막히는지.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내 목소리가 떨렸다.


“아빠는 맨날 ‘괜찮아질 거야’, ‘힘내’ 같은 말만 하잖아요.

그런 말,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요.”


아빠는 말이 없었다.

나는 아빠가 상처받은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렇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나를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 미안해요.”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한숨 섞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밤, 잠은 오지 않았다.

천장을 보다가, 핸드폰 불빛을 보다가,

다시 천장을 봤다.


새벽 3시, 4시.

눈은 감겼지만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시험, 친구들, 선생님, 내일의 학교

다시 반복될 하루.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우리는 결국 모두 늙고, 죽는다.

그게 자연의 이치 라지만,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너무 당연해서, 아무 의미도 없어서.


아빠는 늘 말했다.


“모든 건 이어지는 거야.

조상도, 부모도, 우리도, 그리고 너도.

우리가 사라져도, 꽃과 나무는 남아서 너를 지켜줄 거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꽃밭이 지켜준다고?

그런 게 세상에 어딨어.


그날 아침, 나는 다시 교복을 입었다.

아무 감정도 없이 복도를 걷는 동안 누군가

어깨를 치고 지나갔지만 사과는 없었다.

그냥 그럴 뿐이었다.


교실 문을 열자, 웅성거리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누구도 나를 보지 않았다.

아니, 모두가 일부러 보지 않았다.


창가 맨 뒤 자리에 앉았다.

펜을 굴렸다. 글씨는 쓰이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 계단, 그리고 옥상으로 향하는 문.

늘 잠겨 있던 그 문이, 오늘은 열려 있었다.

마치, 누군가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옥상엔 바람이 불었다.

차갑고, 살아 있는 듯한 바람.

나는 난간으로 걸어갔다.


운동장 아래,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아이들은 행복할까.

아니면 나처럼, 연기 중일까.


손끝이 난간에 닿았다.

쇠의 차가운 감촉이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이 모든 게 끝날 것 같았다.


“미안해, 아빠.”


발끝이 허공으로 미끄러졌다.
몸이 난간 밖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세상이 일제히 속도를 잃었다.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그런 소리가 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귀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찢겨 나가는 소음이 꽂혔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귀청을 긁는 쇳소리, 누군가 오래된 유리창을 망치로 내리치는 듯한 파열음,
그리고 몸속 뼈와 내장이 한 번에 쥐어짜이는 감각.

그동안 쌓인 기억과 감정,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눌렸다가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 드디어 끝나는구나.’

그 생각이 떠오른 찰나 모든 것이 뚝, 하고 끊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먼저 돌아온 것은 숨이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 소리만으로도 폐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거친 시멘트 바닥이 볼과 팔에 닿아 있었다.


‘… 안 죽었어?’


천천히 고개를 들자, 눈앞 풍경이 나를 덮쳐 왔다.

녹이 잔뜩 슨 난간, 초록빛 얼룩이 번진 낡은 급수탑,
어디선가 풍겨오는 오래된 먼지와 곰팡이 섞인 공기 냄새.

지금 이 순간 막 지어진 학교가 아니라,
십수 년 동안 햇빛과 비를 맞은 오래된 건물의 냄새였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