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아빠.”
발끝이 허공으로 미끄러졌다.
몸이 난간 밖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세상이 일제히 속도를 잃었다.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그런 소리가 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귀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찢겨 나가는 소음이 꽂혔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귀청을 긁는 쇳소리, 누군가 오래된 유리창을 망치로 내리치는 듯한 파열음,
그리고 몸속 뼈와 내장이 한 번에 쥐어짜이는 감각.
그동안 쌓인 기억과 감정,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눌렸다가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 드디어 끝나는구나.’
그 생각이 떠오른 찰나 모든 것이 뚝, 하고 끊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먼저 돌아온 것은 숨이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 소리만으로도 폐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거친 시멘트 바닥이 볼과 팔에 닿아 있었다.
‘… 안 죽었어?’
천천히 고개를 들자, 눈앞 풍경이 나를 덮쳐 왔다.
녹이 잔뜩 슨 난간, 초록빛 얼룩이 번진 낡은 급수탑,
어디선가 풍겨오는 오래된 먼지와 곰팡이 섞인 공기 냄새.
지금 이 순간 막 지어진 학교가 아니라,
십수 년 동안 햇빛과 비를 맞은 오래된 건물의 냄새였다.
몸 곳곳에서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팔꿈치와 무릎이 까져 있었고, 등은 바닥에 세게 부딪힌 탓에 욱신거렸다.
하지만 통증보다 더 큰 것은 이질감이었다.
뭔가가 결정적으로, 처참하게 뒤틀렸다.
그때였다.
옥상 반대편 난간 쪽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하나 보였다.
내 시선이 그쪽으로 끌렸다.
교복 차림의 소년. 어깨가 젖어 있었다.
눈물인지, 비인지 구분되지 않는 어두운 물기가 셔츠 등에 번져 있었다.
난간 밖으로 소년의 손가락이 걸쳐 있었다.
마치 약간만 힘을 주면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버릴 자세.
그는 이미 세상과의 마지막 선을 넘을 준비를 마친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
방금 전까지 내가 품었던 감정,
방금 전까지 내가 바라보던 끝.
그 모든 것이 소년의 뒷모습과 정확히 겹쳤다.
‘안 돼.’
생각이 먼저가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했다.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소년의 몸이 난간 앞으로 조금 더 기울어지는 순간
나는 거의 기어가다시피 그쪽으로 몸을 던졌다.
“안 돼! 멈춰!”
비명이 목에서 터져 나왔다.
밤인지 낮인지조차 분간 안 되는 하늘 아래, 그 목소리가 옥상 위를 갈랐다.
소년이 놀라 고개를 들 틈도 없이, 내 손이 그의 교복 상의를 거칠게 붙잡았다.
힘을 제대로 줄 수 없는 자세였지만 온몸의 체중을 실었다.
둘의 몸이 함께 난간 안쪽으로 구르듯 넘어왔다.
낡은 바닥에 등과 어깨가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나는 숨이 튀어나왔고, 그의 입에서는 거친 욕설과 비명이 섞인 소리가 튀어나왔다.
“놔! 뭐 하는 거야, 미쳤어?!”
그는 온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나는 그를 다시 난간 쪽으로 보내지 않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그의 상의를 움켜쥔 채 몸으로 눌러 붙잡았다.
팔과 다리가 저렸고, 폐는 아직 제대로 공기를 들이마시지 못했다.
그럼에도 손이 떨리는 것은 힘이 없어서라기보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놓치는 순간, 이 아이는 그대로 사라질 것 같았다.
그가 떨어지는 순간, 자신 역시 이 낯선 시간에서
같이 지워져 버릴 것 같은 설명하기 힘든 공포.
“놔라니까! 너 누구야! 왜 방해해!”
그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어져 얼굴 반을 가렸다.
나는 헐떡이는 숨 사이로 눈앞의 얼굴을 겨우 확인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다시 한번 뒤집혔다.
어린 얼굴이었다. 볼에 아직 앳된 살이 남아 있었고,
눈동자는 성인이 되기 전 특유의 불안과 반항이 섞인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형태와 선, 웃을 때 생길 것 같은 미간의 주름,
입꼬리의 모양, 내가 평생을 보아 온 얼굴이었다.
단지, 시간이 거꾸로 감긴 것뿐.
17살쯤 되어 보이는 그는 분명히, 아빠와 닮아 있었다.
닮은 수준이 아니라, 그 자체였다.
젊은 날의 아버지. 아직 어른이 되기 전,
세상에 지치고도 남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나이.
그의 눈동자 속에는 누구보다 내가 너무 잘 아는 색이 들어 있었다.
설명하기 힘든 무력감, 몸보다 더 무거운 하루,
살아남는 것 자체가 벌처럼 느껴지는 감정.
나는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목이 죄어들고, 가슴이 타들어 갔다.
눈물이 노골적으로 치밀어 올랐다.
“말도 안 돼...”
입술이 떨렸다.
‘아빠야.’
머릿속에서 그 단어가 억지로 밀고 올라왔다.
“아빠가 왜 여기 있어... 여기는 도대체 뭐야 어디야...”
말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아빠는 그 말을 듣고 더 크게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아빠? 지금 장난해? 너 누구냐니까?
죽으려고 하는데 네가 뭔데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
아빠의 목소리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눈에는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고, 손등에는 난간을 넘어가기 위해 힘을 줬던
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에게 지금 이 상황은 거의 공포에 가까웠다.
막 뛰어내리려던 순간, 어디선가 떨어져 내려온 이상한 여자애가
자신을 끌어안고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그녀의 교복은 본 적 없는 디자인이었고, 눈빛은 마치 자신이 아니면서도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깊은 구멍을 품고 있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뼈가 쑤셨다.
하지만 정신은 기묘하게 선명해지고 있었다.
‘지옥이네.’
나는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는 시간, 죽으러 왔다가 다시 살아 있고,
살려야 할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인 곳.
자신이 삶을 포기한 대가로 던져진 형벌.
그 한가운데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스스로를 부수려 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정신 놓고 울거나 버둥거리면, 아빠는 그 틈에 난간을 넘을 거야.’
충격은 순식간에 차가운 본능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몸을 눌러 붙잡고 있던 팔에 다시 힘을 줬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빠의 딸’로 있으면 안 됐다.
그를 살려야 하고, 이 빌어먹을 시간을 빠져나가야 한다면
이곳에서 나는 그냥 이 학교의, 이 시대의 누군가여야 했다.
아빠는 여전히 버둥거리고 있었다.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 너도 나처럼 죽으러 온 거 아니야?
그럼 그냥 두지, 왜 말려! 미친 거 아냐?!”
목소리는 떨렸고, 손은 내 팔을 떼어내려 애썼다.
나는 숨을 고르며 아빠의 손목을 조금씩 느슨하게 잡아 내리면서
난간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두 사람의 몸이 조금씩 바닥 쪽으로 더 밀려 내려가자,
이제 소년이 곧장 난간을 붙잡고 일어나는 것은 쉽지 않은 자세가 되었다.
가슴이 아직 쿵쾅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어떻게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일단, 떨어지는 건 그만하자.”
몸싸움이 잠시 멈춘 그 틈, 서로의 호흡만 거칠게 오르내렸다.
이제야 아빠의 눈동자가 조금 또렷이 보였다.
두려움, 분노,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 그리고 아주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살짝의 방향 상실.
그때의 나는 아직 몰랐다.
이 순간이 이후 옥상에서 이어질 긴 대화의 시작이 될 거라는 걸.
그리고 지금 막 난간에서 떨어져 나온 이 소년이 자신의 과거를 바꾸고,
미래를 지키기 위한 첫 번째 매듭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면 나는 죽으러 간 게 아니었다.
어쩌면 잃어버린 나 자신을, 아빠를 다시 찾으러 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