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함 이면에 숨겨진 진짜 리더의 맷집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K-뷰티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볼 때면, 종종 아득한 기분이 든다.
불과 몇 년 전, 내가 뷰티 씬에 뛰어들어 바닥부터 구르던 시절만 해도 이 시장은 지금처럼 거대한 자본과 체계적인 시스템이 안착한 곳이 아니었다.
기반조차 없는 미지의 척박한 땅,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의 위협이 일상이었던 야생 그 자체였다.
좁고 지저분한 회의실, 먼지 쌓인 화장품 샘플들이 이리저리 나뒹구는 정신없는 사무실 한편.
비록 환경은 초라했지만, 적어도 내 눈빛만큼은 '성장'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무섭게 반짝이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합리적이고 따뜻한 시스템 속에서 브랜드를 키워온 분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0에서 100을 만드는 과정'은 결코 우아하지 않았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타인에게 나쁜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성격이 예민하거나 이상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정돈된 삶의 궤적을 그려왔다.
하지만 그날, 브랜드의 명운이 걸린 꽤 규모가 큰 모델 촬영장에서 나는 내 인생의 가장 거대하고 비이성적인 '충격'을 맞닥뜨렸다.
현장의 총괄 책임자이자 모든 비용을 지불하는 '광고주'였던 나에게,
모델의 스타일리스트가 귀를 의심케 하는 폭언을 내리꽂은 것이다.
"아, 진짜 싸가지 없는 X."
그녀는 현장에서도 언행이 정돈되지 않기로 유명했다.
특유의 거친 언어와 태도는 내가 평생 쌓아온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소통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날것의 그 자체였다.
뒤돌아서며 무심히 날아온 그 한마디는, 내 자존심을 무참히 구겨버리는 모멸감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판을 엎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턱끝까지 차오른 모멸감을 꾹꾹 눌러 담으며, 그 수모를 온전히 다 삼켜냈다.
바보 같아서가 아니었다.
나 개인의 감정보다, 하나부터 열까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한 '촬영 현장'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고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결과물'을 기어이 얻어내는 것이 책임자로서 수백 배는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감정을 갈무리한 채, 식은땀을 흘리며 끝까지 웃는 얼굴로 현장을 지휘하고 책임졌다.
모든 촬영이 무사히 끝나고 멀고 먼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몇 번의 환승을 거쳐 터덜터덜 걸어가는 내 고개는 한없이 푹 숙여져 있었다.
하루 종일 긴장 상태로 서서 일하느라 만신창이가 된 구두, 퉁퉁 부어오른 다리. 제3자가 보았다면 참 측은할 만큼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표정조차 지어지지 않는 텅 빈 얼굴로 덜컹거리는 지하철 창밖을 보며,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리더는 결국 이 비이성적인 모든 상황을 견뎌내는 자리다.'
그리고 그 어둑하고 쓸쓸한 퇴근길에서, 나는 훗날 내 커리어를 관통할 아주 단단한 다짐 하나를 새겼다.
"내가 훗날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가더라도, 절대 이 알량한 권력으로 타인을 상처 입히지 않으리라.
나와 함께 일하는 상급자, 동급자, 하급자 모두를 직급과 무관하게 똑같이 존중하리라.
내가 건네는 진심 어린 존중과 배려가 그들의 마음에 작은 여유를 만들어주고,
그 여유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선순환을 기어이 만들어 내겠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내가 거대한 숫자를 만들어낸 기획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진짜 비결은 화려한 마케팅 스킬이나 번지르르한 기획서에 있지 않았다.
나의 진짜 무기는 그 거친 야생에서 내 인생에 한 번도 없었던 수모를 기꺼이 삼키며 책임을 다했던 '맷집', 그리고 내가 받은 상처를 누군가를 찌르는 가시로 돌려주지 않고 '존중과 포용의 리더십'으로 승화시킨 나만의 '회복탄력성'이었다.
오늘도 화려한 결과물 뒤에서 남몰래 구겨진 마음을 다듬으며,
만신창이가 된 신발을 이끌고 무거운 퇴근길에 오르는 모든 실무자분들께 깊은 연대와 응원을 보낸다.
당신이 오늘 속으로 삼켜낸 그 척박한 시간과 억울함은 결코 당신을 갉아먹지 못한다.
그것은 당신의 내면을 무쇠처럼 단단하게 제련하여,
훗날 어떤 거친 야생에 던져져도 스스로를 지켜내고 또 다른 누군가를 품어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따뜻한 무기'가 될 테니까.
(Editor's Note) [여러분의 '진짜 고민'을 듣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조직에서 '비이성적인 상황'이나 '억울한 순간'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계신가요? 평소 업무를 하며 풀리지 않았던 답답함이나 고민이 있다면 편하게 댓글로 남겨주세요. 제가 현장에서 온몸으로 부딪히며 얻은 인사이트로 다음 연재에서 시원하게 다루어 보겠습니다.
글. 브랜드 기획자 한희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