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What)가 아닌 의도(Why)를 복사하는 여과 과정의 미학
기획자의 PC에는 누구나 '레퍼런스' 폴더가 있다.
핀터레스트의 힙한 이미지, 1등 경쟁사의 상세 페이지, 감각적인 브랜드의 마케팅 워딩들. 우리는 습관적으로 타인의 성공 사례를 수집하고 저장한다. 하지만 수천 장의 레퍼런스를 쌓아두고도 정작 내 결과물이 지독한 'B급 카피캣'에 머물고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냉정히 물어야 한다.
나는 그들의 '결과(What)'를 훔쳤는가, 아니면 그 너머의 '의도(Why)'를 훔쳤는가.
많은 기획자가 범하는 치명적인 실수는 레퍼런스를 마치 정답지처럼 여기고 '현상'만 가져온다는 것이다. "요즘은 이런 폰트가 유행이네", "이런 모델 컷이 전환율이 좋대"라며 눈에 보이는 껍데기를 복사한다.
하지만 진짜 기획은 질문의 방향을 틀 때 시작된다. "왜 수많은 선택지 중 이 방식을 골랐을까?", "이 투박한 문구는 고객의 어떤 결핍을 건드리기 위해 설계되었나?" 레퍼런스는 기획자가 고객의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최종 결과물일 뿐이다. 우리는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사고의 궤적'을 추적해야 한다. 껍데기가 아닌 단서를 찾는 것, 그것이 레퍼런스를 대하는 기획자의 첫 번째 예의다.
레퍼런스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타인의 아이디어를 내 브랜드의 정체성이라는 필터에 통과시키는 과정이다.
과거 고기능성 앰플을 기획할 때였다. 시장의 1등 제품들은 하나같이 '숫자'를 말하고 있었다. 성분이 몇 ppm 들어갔는지, 임상 결과 수치가 몇 퍼센트인지. 훌륭한 레퍼런스였지만 나는 그 수치를 그대로 가져오지 않았다. 대신 ‘집에서 느끼는 시술의 팽팽한 텐션'이라는 우리만의 필터를 적용했다.
그 결과, 흔한 스포이드 용기 대신 '주사기' 형태의 용기를 채택했고 그에 걸맞은 마케팅 언어를 새롭게 설계했다. 레퍼런스에는 없던 우리만의 문법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아이디어는 필터를 거치는 순간 변형되며, 그 지독한 변형의 과정이 곧 브랜드의 오리지널리티가 된다.
레퍼런스를 내 것으로 만드는 힘은 결국 데이터 직관에서 나온다. 수많은 성공 사례를 보고 "똑같이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탁월한 기획자는 남들이 다 보는 정답지에서 ‘남들이 보지 못한 공백'을 찾아낸다.
"이 완벽해 보이는 레퍼런스가 놓치고 있는 고객의 또 다른 불편함은 무엇일까?" 시장에 한 획을 긋는 역대급 매출은 바로 이 질문의 공백을 메울 때 발생한다. 1등을 따라가는 것은 안전하지만, 1등이 보지 못한 구석을 파고드는 것은 파괴적이다. 그 한 끗 차이가 카피캣과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기획자를 가르는 결정적 변수가 된다.
마치며: 백지 앞에 서는 두려움을 즐길 것
레퍼런스는 훌륭한 길잡이지만, 동시에 기획자의 상상력을 가두는 가장 견고한 감옥이기도 하다.
남들이 이미 풀어놓은 정답지를 훔쳐보는 시간을 줄이고, 우리 고객의 결핍과 독대하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 타인의 성공을 내 브랜드의 서사로 치환하는 치열한 여과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당신의 기획은 누군가의 또 다른 '레퍼런스'가 될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