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싸움 속에서 지켜낸 온기
피부 아래의 상처는 사라져도,
끝까지 곁을 지켜준 온도는 식지 않는다
욕창은 내게 뜻하지 않은 손님이었다.
원치 않게 찾아와 오래 머물렀다.
그렇다고 함부로 내칠 수도 없는 존재였다...
마치 불청객처럼 불쑥 나타나지만,
막상 오면 비위를 맞추고 살살 다뤄야만 한다.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가도,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묘하고 피곤한 관계.
화상으로 시작된 긴 겨울
하반신에 감각이 없다는 건,
상처를 늦게 알아차린다는 뜻이었다.
추웠던 겨울날, 나는 매일 밤
소형 전기장판을 배 위에 올려두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감각이 없는 몸은,
전기장판이 허벅지 아래로 흘러내린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진단은 3도 화상
“감각이 없으니까, 몰랐을 거예요.”
의사의 말이 귓가에 남았다.
나를 위로하려 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 말은 오히려 내 몸이 가진 한계를 또렷하게 깨닫게 했다.
그 후로도 뜨거운 물을 쏟아 또다시 화상을 입었고,
피부이식 수술이 이어졌다.
다치기 전에는 무릎이 까진 적조차 없던 내 다리에는,
어느새 크고 작은 화상 자국이 흩어져 남았다.
그날 이후 나는 전기장판도,
뜨거운 물도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온기라는 것이 꼭 따뜻함만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첫 욕창 수술
꼬리뼈 피부가 0.5cm 정도 벗겨졌을 뿐이었다.
겉보기엔 대수롭지 않은 상처처럼 보였지만,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학병원에서 내린 결론은 ‘꼬리뼈 절제 수술’
그 길로 5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지냈다.
회복 후에도 곧바로 재활병원으로 옮겨 6개월을 더 보냈다.
하루하루가 드레싱과 재활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쯤 되니 기본적인 상처 치료에는 능숙해졌지만,
욕창이라는 상대는 결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것은 끝내 떠나지 않는 손님 같았다.
2019년, 끝나지 않는 싸움
한 달 동안 39도의 열이 계속됐다.
응급실에 가기 이틀 전부터는
체온계가 측정을 멈췄다.
마지막으로 찍힌 숫자는 40.8도.
그 이상은 기록조차 되지 않았다.
도저히 버틸 수 없어 새벽에 응급실로 향했다.
원래 다니던 병원에서는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결국 구급차를 타고 10km 떨어진 3차 병원으로 옮겨졌다.
응급실 제일 안쪽 집중치료실로 옮겨진 나에겐
10명 넘는 의료진이 동시에 나를 둘러쌌다.
“패혈증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모든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너무 무서워서 치료를 못 받겠다고 매달렸다.
“남편 얼굴만 보게 해 주세요.”
남편과의 짧지만 결정적인 순간
교수님이 남편을 불러주셨다.
남편이 들어와 내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 바로 앞에 있을 테니까, 치료 잘 받아.”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이 심장이 덜컥 가라앉는 공포를 밀어냈다.
“이제 치료하셔도 됩니다.”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의료진은 곧바로 움직였다.
목, 팔, 발등… 잡을 수 있는 모든 혈관에 링거가 꽂혔다.
병실에서의 두 달
이번엔 엄마 대신,
남편이 두 달 가까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내 곁을 지켰다.
밥도 누운 채로 먹어야 하는,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절망이 차오르던 순간에도
남편은 매일 아침,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사 왔다.
그해 6월 말,
초여름의 공기가 병원 창문으로 밀려 들어올 때,
그는 병원 앞 큰 마트에서 선풍기를 사 들고 돌아왔다.
“이거 있으면 조금 낫겠지?”
웃으며 선풍기를 설치하던 손길이 아직도 기억난다.
점심시간이 되면,
“병원 밥도 좋지만, 당신 힘내려면 잘 먹어야지.”라며
보양식 위주의 음식을 포장해 왔다.
저녁엔 과일과 샐러드로 상을 차려주었다.
아침엔 갓 구운 빵, 점심엔 뜨끈한 국물 요리,
저녁엔 시원한 수박과 샐러드.
병실 안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로
하루 세끼가 조용히 차려졌다.
비용의 무게
그러나 따뜻한 온기와는 별개로,
현실은 늘 무겁게 다가왔다.
욕창 수술에 걸린 두 달, 병원비는 2천만 원 가까이 나왔다.
나는 매주 병실로 전달되던 중간 영수증을 보고
깜짝 놀라 “이거 잘못 나온 거 아니야?” 남편에게 물었다.
그다음 주부터 영수증이 오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나서 간호사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남편이 간호사실에 부탁해
매주 나오는 영수증을 자기에게만 달라고 했다고 했다.
내가 보고 걱정할까 봐,
받은 즉시 원무과로 가서 바로 납부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
말없이 감당해 온 그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좋은 방석 하나에도 돈이 많이 든다.
미국에서 휠체어를 맞출 때 함께 구입한 방석은 60만 원이 넘었다.
비싸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지만,
보장구는 특히 값이 높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왜 이렇게까지 비쌀까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수술과 회복
열이 내리자마자 성형외과 수술이 시작됐다.
온몸에 염증이 퍼져 있었다.
이후 2일에 한 번, 수술실에서 드레싱을 받았다.
그 횟수가 15번.
교수님은 “두 달만 더 버티면 퇴원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퇴원 후에도 두 달은 꼼짝없이 누워 지냈다.
퇴근한 남편은 매일 드레싱 준비를 하고,
내 상처를 살피며 붕대를 갈아주었다.
그렇게 4개월 만에 나는 다시 앉을 수 있었다.
상처가 남긴 온도
통증은 크고, 마음은 절망적인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시절이 전부 슬프지만은 않았다.
아이스커피의 시원함, 선풍기 바람, 병실 안의 작은 식탁,
그리고 늘 내 곁에서 손을 잡아준 사람의 온기.
나는 가끔 남편에게 묻는다.
“여보가 다쳤다면, 과연 내가 당신처럼 했을까?
난 자신 없을 것 같아.”
다시는 입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은 내 의지와는 별개의 일이었다.
남은 흉터마다,
그때의 온도가 아직도 남아 있다.
“사라지는 상처보다 오래 남는 건,
끝까지 곁을 지켜준 따뜻한 마음에 대한 온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