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못한 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다치기 전 즐겨 입던 청바지와 구두.
버리지 못한 건 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이었다.
아침 재활치료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 날이었다.
점심이 오기 전, 병실 문이 ‘똑, 똑’ 두드려졌다.
익숙하지 않은 방문 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
“여보.”
문틈 사이로 들어온 건,
연락 한 통 없이 찾아온 남편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눈물이 먼저 흘렀다.
“여보가 왜 연락도 없이…”
그 한마디를 마치기도 전에,
남편은 내 눈가를 조심스레 닦았다.
그리고 그다음 말이 내 가슴을 흔들었다.
“이제 집에 가자. 혼자 병원에 너무 오래 있게 해서 미안해.”
나는 얼떨결에 “집에 가서 어떻게 지내?”라고 말했지만,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파도처럼 일었다.
더위 속에서 땀을 흘리며,
다치기 전 내가 사줬던 같은 옷과 낡은 신발 차림으로
4년을 버텨온 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 옷차림이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그날 오후,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나 이제 퇴원할게요.”
수화기 너머 잠시의 정적 뒤
“그래, 아범 따라서 퇴원해.”
아빠의 먹먹한 목소리 속에는
남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함께 담겨 있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남편이 준비한 건 새 아파트였다.
문을 열자, 거실은 놀라울 만큼 비어 있었다.
안방에는 침대, 거실에는 TV—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엔 황당했지만 곧 깨달았다.
휠체어를 타고 지낼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공간을 비워둔 거였다.
다음 날, 남편이 출근하고 홀로 남은 집.
고요한 거실에서 신발장이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자,
내가 다치기 전 즐겨 신던 구두 한 켤레가 있었다.
순간, 숨이 막혔다.
다시는 신을 수 없는 구두가
그 자리에 나를 기다리듯 서 있었다.
나는 그대로 휠체어에 앉아 울었다.
잠시 후, 안방 옆 옷방으로 향했다.
그곳 옷걸이에는 청바지 두 벌이 걸려 있었다.
사고 전, 가장 자주 입던 바지였다.
나는 옷을 사랑했다.
의상학을 전공했고, 옷은 내 삶의 중심이었다.
나는 항상 전날 밤,
다음날 입을 옷을 미리 거울 앞에서 입어본 뒤에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었다.
그 작은 의식이 내일을 살아갈 용기가 되어 주었고,
예쁘게 차려입고 거울을 보며 웃던 순간들은
내게 가장 소중한 일상이었다.
그런 내가 휠체어에 앉아
손 닿지 않는 자리에 걸린 청바지를 마주하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이미 모든 걸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엔 아직도 말 못 한 슬픔이 숨어 있었던 거다.
거울 앞에서 웃던 내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이 날 저녁, 남편에게 물었다.
“왜 이건 안 버렸어?”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다 말했다.
“네가 제일 좋아하던 거잖아.
못 입고 못 신는 거 알지만, 쓰레기처럼 버리고 싶지 않았어.
그건 꼭 너를 버리는 것 같았거든.”
그 말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그가 버리지 못한 건,
구두와 청바지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어쩌면 집에 가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안식처가 되어 준 따뜻한 공간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주는 남편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재활병원에서,
겉으로는 괜찮다 말하며 마음에도 없는 미소로
지독한 외로움을 받아들이며 지냈을 것이다.
이제는 다시,
일상이 주는 사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다.
또한 오랜 병원 생활 끝에 지쳐가던 남편의 뒷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당연하다고만 여겼던 삶의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다.
한 남자에게 이렇게 넘치도록 사랑받을 수 있음에,
오늘도 나는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