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 대신, 함께 걷다

나의 다리가 되어준 사람

by 다락방지기


누군가의 손끝에서, 나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아기가 잡은 엄마의 손은, 세상 전부였다.

낙상 사고가 나던 순간부터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다.

구급차 안에서 울리던 사이렌 소리, 그리고 의식을 잃지 않게 하려던 응급구조사의 목소리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남편이 놀라지 않게 하려고 그의 전화번호를 반복해 말했고,

딸이 안전한지 꼭 확인해 달라며 엄마의 번호를 건넸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던 유일한 일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지키려는 작은 행동뿐이었다.


며칠 뒤, 수술을 마친 후 병실에서 교수님을 마주했을 때

차마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던 엄마의 얼굴이 내 앞에 있었다.

단 한 치의 희망도 주지 않는 교수님의 표정 속에서

나는 이미 그 말을 듣기 전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반신마비 환자로서 스스로의 일상을 얼마나 지켜낼 수 있을지가 달려 있음을.

그날 나는 담담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재활을 열심히 해서 나 자신을 지켜내겠다고.




단념한 뒤의 며칠은 내 마음속 불안을 지우기 위해 애쓰던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건넨 “힘내요”라는 말이 진심의 위로인 줄 알면서도,

그때의 나는 어색한 미소로 “네, 감사합니다”만 되뇌며 마음의 불씨를 꺼트리기 바빴다.


누군가의 시선과 질문이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마음의 문을 조금씩 닫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것이 나를 위한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병원 생활이 6개월쯤 되었을 때, 나는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같은 병실의 환자들, 곁을 지키는 가족들, 요양보호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아픈 사람의 마음과 그들을 돌보는 사람의 고단함을 배웠다.


비록 다리는 멈췄지만, 나의 다리가 되어준 휠체어를 타고

세상이 멈춘 듯했던 시간을 향해 아주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29살, 아직 젊다고 하면 젊은,

한 아이의 엄마인 내가 ‘세상이 멈췄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시간들이 이렇게 흘러갔다.




서울에서 재활을 이어가던 시간 동안 남편은 나와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혼자 많은 것을 감당해야 했고, 나는 삶을 흔드는 통증 속에서 그의 손을, 그의 온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일요일 저녁, 남편이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무너졌다.

남편에게도 쉼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만 더 있어 달라고 떼를 쓰던 나는,

30살의 어른이면서도, 마치 엄마의 손이 세상의 전부라 느끼던 불완전한 아이 같았다.


그때 내가 잡은 남편의 손은,

아마도 무겁고 큰 책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한 번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손이야말로 내가 다시 살아갈 수 있었던 세상의 전부였다.


남편은 매주 금요일 퇴근 후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때의 병원은 우리의 전부였고, 남편을 기다리는 시간은 나를 작고 초라하게 만들면서도 설레게 했다.


그러다 우리는 병원 밖으로 조금씩 나가기 시작했다.

짧은 산책, 근처 식당에서의 식사, 공원 벤치에서의 짧은 대화.

그 모든 순간이 우리에게는 특별한 여행이었다.


세상 밖의 길은 휠체어를 위한 곳이 아니었지만,

남편은 두려움 없이 내 곁에서 나와 함께 걸었다.

그날부터 그는 내 다리가 되어 주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40대 중반이 된 지금도,

남편은 여전히 내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예쁘다고 말해준다.

그 말 한마디가 어떤 위로보다 크고 따뜻하다.


4년의 병원 생활과 퇴원 후 12년의 세월 동안

내가 안전하고 평온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건

남편의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쌓여 만들어진 안정감에서 오는 사랑 덕분이었다.


그 사랑은 화려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지만,

하루의 끝에서 나를 안심시켜 주는 가장 단단한 울타리였다.


지금도 우리는 종종 데이트를 한다.

동네 맛집에서 함께 식사하고,

작은 컵 아이스크림을 하나 들고 공원 벤치에 앉아 나눠 먹는다.


이런 평범한 하루들이 내겐 가장 특별한 행복이다.

그런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오늘도, 남편의 손끝에서.




나는 삶이 멈췄다고 느낀 적은 있어도, 단 한 번도 삶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한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딸이었다.


딸과 팔짱 끼고 거리를 걷고, 함께 옷을 고르고, 예쁜 카페에서 사진을 찍는

그런 평범한 순간들을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이 내 안에 오래 남았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몸이 함께하지 못한다면 마음으로는 언제나 곁에 있는 엄마가 되자고.

아이에게 정서적으로 깊이 닿은 사람,

몸은 떨어져 있어도 언제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 남고 싶었다.


그게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고,

그렇게 나는 다시 살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딸의 웃음이 나의 심장이 되었으니까.




이제 나는 걸음 대신 마음으로 걷는 법을 배우며 살아가는

중이다.

때로는 커다란 벽이 내 삶을 가로막을 때도 있지만,

나의 곁을 지켜주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나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아갈 용기와 힘을 낼 수 있다.


오늘도 나는 나를 지켜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한 발짝 앞으로,

그리고 또 한 발짝 앞으로,

내일의 나를 향해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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